* 대학생 적흑
사랑을 하면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인대! 어디선가 로맨스 소설을 읽고 온 모모이가 외쳤다. 말도 안 돼. 아카시는 현대과학을 믿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아카시에게 하늘이 왜 파란색이냐고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빛의 산란 때문이라 대답할 수 있었다. 산란이 뭔지에 대한 설명은 덤이다. 그런데 뭐? 분홍빛?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카시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 빛내는 모모이에게 찬물을 끼얹을 만큼 차가운 사람도 아니어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모모이, 말하는 도중 미안한데 내가 수업이 있어서…….”
“아, 미안해! 우리가 너무 오래 잡아뒀지?”
“아냐, 괜찮아. 오랜만에 같이 밥 먹어서 즐거웠어.”
이따 보자, 아카시. 심드렁하게 있던 아오미네가 인사를 건넨다. 아카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라면 다음 강의까지 같이 좀 노닥거렸겠으나 이번학기는 추가 학점을 더 듣고 있기에 좀 바빴다. 교양이라 다행이지. 아카시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9월의 날씨는 참 좋았다. 아직까지 잔재하는 여름의 뜨거운 열기보다도 서늘해진 공기가 더 실감났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이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사한다. 하늘은 파랗게 물들었고 눈부신 햇빛은 머리칼에 닿아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웃으며 지나가는 학우들의 옷에는 단풍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선연해진 가을을 바라보던 아카시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강의실을 찾았다.
108, 108……. 아, 여기군. 오랜만에 찾아온 교양 강의실은 책걸상을 싹 바꿨는지 훨씬 깔끔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평평했던 강의실이 계단식으로 바뀌기 까지.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던 아카시는 중간보다 약간 뒤쪽 좌측 편에 자리를 잡았다. 학번과 학년을 고려한 위치였다.
아카시가 자리에 앉자 들어올 때부터 술렁이던 학생들이 대놓고 흘끔거리며 아카시를 훔쳐보았다. 헉, 그 아카시 선배잖아? 그러게. 이 수업 듣나보다. 대박. 와, 진짜 잘생겼어. 눈매 좀 봐.
안 들리게 한답시고 속삭이는 목소리임에도 제 얘기인지라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아카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일이 신경 쓰다간 피곤하고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게 뻔했다. 소문답게 풍선처럼 부푼 말들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아카시는 무심한 시선으로 강의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엔 고학년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 강의 조별과제도 있던데 별 일이네. 건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때였다. 문가를 응시하던 아카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건 아까 올려다보았던 가을 하늘이었다. 아카시는 사람의 눈동자가 그렇게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스물 몇 년의 인생에서 처음 살았다. 소년의 눈에는 하늘이 담겨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엔 아직 낮임에도 반짝거리는 별이 떠있다. 하늘에 붓을 휘저어 물에 풀면 저런 색일까. 마치 시리도록 눈부신 블루 토파즈 같았다.
아카시는 어머니의 보석함에서 블루 토파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저 눈동자 앞에서는 그 어떤 고가의 블루 토파즈도 제 빛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보다 조금 채도가 낮은 색의 머리카락은 잘 마른 듯 붕붕 떠있다. 봄의 햇빛 냄새가 물씬 풍길 것 같은 보송함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앳되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에서 우유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카시는 손가락으로 코를 문질렀다.
매력적이네, 표정은 아까와 별 다를 바 없이 무심했으나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흥미를 숨길 줄 몰랐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강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저 예쁜 보석의 주인을. 자신만 빼고.
그가 다가가자 언제 왔냐는 듯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한 학생의 표정이 웃겨 아카시는 자기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게 신기해 아카시는 이제 대놓고 그 아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쿠로코 테츠야.”
“네.”
이름이 테츠야구나. 가타카나인가? 아카시는 テ, ツ, ヤ 세 글자를 끄적끄적 적어보았다. 역시 어린 티가 난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테츠야는 1학년이었다. 테츠야, 테츠야. 입안에서 동그랗게 울리는 발음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눈치 챘는데 테츠야는 꼭 저같이 깜찍한 노란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품이 제법 넉넉한 게 몸의 선이 얇은 듯했다. 모자에 푹 파묻힌 목덜미가 곧고 가늘어서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목덜미를 쭉 훑었다.
시선을 느낀 걸까. 테츠야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기 토끼 같은 몸짓이었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아카시가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큭큭 웃었다. 아, 진짜 귀엽다. 쟤랑 조별과제 하면 좋겠다. 빠끔히 드러난 아카시의 두 눈이 빛났다.
“안녕하세요,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거 봐. 뭐랬어. 내가 쟤랑 하고 싶댔잖아. 아카시는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테츠야한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 아카시에게 있어 테츠야와 같은 조를 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정확히는 빡세기로 유명한 아카시와 같은 조를 지원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고, 쿠로코는 쿠로코의 존재를 알아챈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조 편성에 참여하지 못한 거였지만.
하필 또 공교롭게 조를 짜지 못하고 남은 사람이 두 사람 뿐이었으며 어차피 한 조당 정원은 3명이라 2명도 괜찮다고 교수님이 봐주신 덕에 둘은 그렇게 같은 조가 되었다. 눈앞의 1학년은 아카시를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1학년이에요.”
얘는 왜 목소리도 귀엽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와중에도 아카시는 나는 3학년이에요, 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 손은 작지만 제법 강단 있게 뼈마디가 잡혔다. 조금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아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저기, 아픈데요.”
“아, 미안해요.”
빠른 사과에 쿠로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 앞임에도 긴장하지 않고 덤덤한 모습이 신기해 아카시는 또 무심코 쿠로코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선배님? 맙소사. 이제는 남자애가 고개 갸우뚱하는 것도 귀여워 보이네. 아카시가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 때 쯤 쿠로코는 쿠로코대로 조금 겁을 먹고 말았다.
붉은 머리칼과 홍채의 소유자는 강렬한 첫인상답게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적당히 듣기 좋게 만들어진 목소리 등이 보통 철저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이 보였다. 저 조별 과제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 사람의 기준을 만족 시킬 수 있을까요, 카가미 군……. 점심 먹을 시간이 없다며 홀랑 다른 교양으로 옮겨버린 제 동기가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무서워 보이는 선배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 없이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좁은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할 때마다 더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쿠로코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 덤덤한 표정이 아카시 입장에서는 눈앞의 1학년이 묵묵한 게 저만 보면 안절부절 못하는 동기들보다도 더 기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음을 불행히 쿠로코는 알지 못했다. 아카시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고, 결국 참지 못한 쿠로코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 과제는…….”
“아, 과제.”
답지 않게 정신을 놓고 있었다며 화들짝 - 쿠로코가 보기엔 아무 변화 없었지만 - 놀란 아카시가 얼른 강의 계획서를 집어 들었다. 영화와 관련된 교양답게 한 조가 다 같이 영화를 보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였다. 물론 인증샷 포함. 역시 교양은 좋구나…. 교양만 들었던 1학년 시절을 떠올리던 아카시는 아까보다 한결 풀린 얼굴로 쿠로코한테 휴대폰을 내밀었다.
“과제를 하려면 같이 영화를 봐야하네요. 일단 번호 좀 줄래요? 어떤 영화를 볼 지랑 날짜 같은 거 정해야하니까.”
“네.”
쿠로코가 휴대폰을 받아 제 번호를 톡톡 쳤다. 소매에 반쯤 감싸져있는 작은 손으로 자꾸 옮겨가는 시선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일단… 내가 또 다음 수업이 있어서. 끝나고 연락할게요.”
“네, 선배님. 저, 그럼 이만….”
“네. 이따 봐요.”
꾸벅 인사를 한 쿠로코가 종종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나풀 흩날리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카시의 휴대폰 화면엔 11자리의 숫자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흐음. 휴대폰 액정 위를 뱅뱅 맴돌던 아카시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병아리]
*
22:07 [안녕하세요.]
22:07 [같은 수업 듣는 아카시 세이쥬로예요.]
22:07 [늦은 시간 미안해요. 이제 일과가 끝나서.]
[아니에요.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22:19
22:20 [그렇구나.]
22:21 [내 번호 010-0411-1220이에요.]
22:21 [저장해둬요.]
[네!] 22:23
답장이 고분고분 귀엽네. 샤워를 막 끝내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터는 와중에도 아카시는 바쁘게 손가락을 놀렸다.
22:30 [영화 어떤 거 좋아해요?]
[저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22:30
[아, 선배님 말씀 놓으세요.] 22:30
22:31 [그럼 그럴게.]
22:31 [못 보는 영화도 없어?]
[음…. 호러나 공포영화는 잘 못 봐요.] 22:33
[(우는 이모티콘)] 22:33
푸하. 이런 이모티콘도 쓰는구나. 토끼가 눈물을 줄줄 흘리다 못해 공간을 한가득 채우는 이모티콘에 아카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카톡도 귀여워 죽겠다……. 아카시는 베고 있는 베개가 머리카락의 물기로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카톡 삼매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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