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종현 - Lonely (Feat. 태연)
* 그냥... 연애에 서툰 적흑이 보고 싶었어요. ( mm)*
사랑한다는 말은 진부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 가사에서, 드라마에서. 좀 더 보태면 길거리에서조차 사람들이 흔하게 뱉는 말이라고. 남들이 사용하는 가벼운 말로 표현하기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아카시로써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날이 더해지는 마음의 무게는 익숙하지 않아 가둬두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혹시나 입 밖으로 내었다 소중한 마음이 넘쳐흘러 사라져버릴까, 아카시는 어느 순간부턴가 사랑을 입에 담지 않게 됐다. 다만 소복소복 쌓인 감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새어나올 때면 조심히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곤 했다. 그럼 부글거리던 탄산이 얌전해지듯 격정도 가라앉았다.
습관이 된 행동에 가슴이 잠잠해지면 코르크 마개를 씌운 듯 제 안을 꽉 채우는 마음에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꾹꾹 눌러오고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알맞은 표현을 찾게 되면 곱게, 소중하게 키워온 마음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슬프진 않았다. 마음 속 유리병에 찬란히 담겨있을, 어쨌든 사랑인 그것을 꺼낼 날이 언젠간 올 테니까. 완벽해야 할 그 날을 위해 아카시는 더 마음을 고르고 다듬었다.
이렇게 후회할 날이 올 줄은 모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맞은편의 사람이 입술을 앙 다물고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있다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워 손을 뻗었지만 눈물의 주인은 그마저도 쳐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다시 손을 내밀 생각은 못하고 아카시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는 아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 그러니까 쿠로코는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아냈다. 얇고 부드러운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에 젖은 자국이 생긴 게 무색하게 다시 눈물방울이 솟아난다. 울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처량했다.
하늘색 머리칼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달리 찬란하게 빛이 났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 두 사람은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잡았고 쿠로코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카시를 불렀다. 평소와 달랐던 점은 왜? 하고 대답하며 마주한 얼굴이 어딘가 비장해보였다는 점이다.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응.”
“아카시 군. 절 사랑하나요?”
“쿠로코. 그건 전부터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
쿠로코는 부쩍 사랑한다는 말을 졸랐다. 솔직히 말해, 아카시는 빈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마음에 비해 초라하고, 흔해빠졌고,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알았다면 얼마든지 귓가가 닳도록 속삭여줬겠지만 불행히 아카시는 훨씬 더 그럴듯한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이때까지 이런저런 말로 회피만 하던 아카시는 결국 쿠로코에게 솔직히 제 생각을 털어놓았더랬다. 빙빙 돌린 긴 설명에 처음에는 이해해주던 쿠로코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아카시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얼굴엔 점점 서운한 기색이 드리웠다.
시무룩하게 쳐진 보고 있으면 쿠로코가 원하는데 뭔들 못해주랴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곤란한 날들이 늘어갔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려니 싶었다. 대답 없는 아카시에 잡고 있던 손을 휙 뺀 쿠로코만 아니었다면.
“쿠로코……?”
“됐습니다.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손은 왜 빼?”
“잡기 싫어져서요.”
“쿠로코.”
잡기 싫다는 말에 불현 듯 불안감이 차오른 아카시가 뭐라도 말하려 쿠로코를 불렀지만 쿠로코는 냉랭했다. 저를 마주보지 않고 애꿎은 땅바닥만 노려보는 쿠로코의 눈이, 자신을 보기 싫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카시가 다급하게 다시 작은 손을 찾았다.
그러나 뜨겁게 손등을 감싸는 아카시의 손과 달리 쿠로코는 손을 마주 잡지 않고 가볍게 주먹만 쥐었을 뿐이다.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정신이 아득해진 아카시가 얼른 허리를 낮춰 숙여진 쿠로코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마주했다. 쿠로코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쿠로코.”
“…….”
“쿠로코!”
이러다 울겠다 싶어 아카시는 이제 쿠로코의 양팔을 붙잡았다. 힘 조절이 안 된 손이 팔뚝을 꽉 그러쥐었다. 그 악력에 반응이 없던 쿠로코가 아카시를 마주봐왔다. 불안해 흔들리는 눈동자에 울상이 된 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반응 하나에도 이렇게 애타하면서, 도대체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거야? 속상한 마음이 북받친 쿠로코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카시 군.”
“응.”
“저 불안해요.”
“…… 뭐?”
“불안하다고요.”
참다 참다 진심을 내뱉는 목소리가 울음이 섞여 엉망이었다. 말로 하고 보니 지치고 외로운 마음이 더 사무치게 느껴졌다. 울면서 말하고 싶지 않은데, 떼쓰는 어린 아이처럼 입술이 멋대로 씰룩였다. 결국 시선을 떨군 쿠로코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급해진 아카시가 일그러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쿠로코를 바라본다.
“왜, 말을, 흐, 안 해줍니까…….”
“…… 천천히 얘기해도 돼.”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아카시에 쿠로코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쿠로코의 어깨가 달싹인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게 될 것 같아 쿠로코는 딸꾹질을 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처음엔, 괜찮다고, 끅, 생각했어요.”
“…….”
“아카시 군이, 말을 안 해줘도, 흐, 믿었으니까.”
“쿠로코…….”
“그치만……, 흡.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카시 군은 응, 하고 말았잖아요.”
여간 서러운 게 아니었던지 쿠로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흐느끼다 못해 꺽꺽거리면서도 쿠로코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울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듦에도 아카시는 쿠로코가 말을 마칠 때까지 쿠로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쿠로코가 힘들게 전한 본심은 이랬다. 응, 하고 짧게 대답해주고는 저는 어떤지 얘기 해주지 않는 아카시가 서운했다고. 그냥 빈말이어도 나도 사랑한다고만 속삭여줘도 좋았을 것 같다고. 아카시가 저를 많이 좋아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거랑 별개로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시의 마음을 이해하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지다 이 상황에 지쳐버렸다고.
울다 못해 기침까지 하는 쿠로코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입이 썼다. 설마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항상 잘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쿠로코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자신보다 더 강하고 어른스러울 때도 있는 연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그냥 콱 죽고 싶어졌다. 무슨 고집을 피운다고 쿠로코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걸까.
더 화가 나는 건 이 상황에서도 솔직하게 제 마음을 말할 수가 없는 자신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쿠로코의 등을 토닥여주던 아카시의 팔이 돌연 쿠로코를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일단 도망가지 못하게 품에 두고 있어야 진정을 할 것 같다. 불안함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갑자기 아카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쿠로코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눈을 깜박였다. 젖은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아카시 군……?”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고.”
“으응.”
아카시는 답지 않게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느라 애꿎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을 고르고 있는 표정을 올려다보며 쿠로코는 아카시의 가슴팍에 살며시 뺨을 기댔다. 쿵, 쿵. 정상보다 조금 빨리, 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박동이 아카시가 많이 놀랐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기분이었다. 굳건한 사람이 제 한 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구나. 쿠로코는 새삼스레 저를 향한 아카시의 마음을 다시 느꼈다.
쿠로코가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카시는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해 초조한지 발끝을 탁탁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쿠로코를 끌어안은 팔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이 꽉 들어가 있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쿠로코의 입가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 아카시는 이런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 몸짓 하나에 저를 사랑하고 있음이 묻어나오는.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매일 느끼고 있었는데. 괜히 들려주지 않는 그 말 한 마디에 서운함이 들어 투정을 부렸다. 익숙해지면 모른다더니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아카시는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좀 부끄러워진 쿠로코가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카시의 몸이 움찔거린다.
“쿠로코?”
“있잖아요.”
“응.”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불안함과 걱정스러움이 가득하다. 다른 거 하나 없이 오롯이 저만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던 쿠로코가 발꿈치를 들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가볍고 간질간질하게 맞닿은 체온에 아카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쿠로코가 씩 웃었다.
“뭐야……?”
“앞으로 너무 마음이 벅찰 땐 입 맞추기로 해요.”
“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다투는 시간은 아까우니 그 사이에 뽀뽀라도 합시다.”
모든 걸 다 털어낸 쿠로코는 후련한 목소리였다. 쿠로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잠깐 얼이 빠져있던 아카시는 당당한 쿠로코의 표정에 웃기 시작했다.
“좋은 방법이네. 나한테는 표현할 말을 안 찾는 게 더 이득 아니야?”
“그건 아니고요. 찾을 때까지 이걸로 내가 참아주겠다는 말입니다.”
“괜찮겠어? 뽀뽀에 정신 팔리느라 늦어져도?”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래요.”
“그래, 그럼.”
또랑또랑하게 제 주장을 말할 때는 언제고 얘기가 끝나자 민망해졌는지 쿠로코가 품에 얼굴을 숨겼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가 조금 붉었다. 아, 사랑스러워라.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크게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웃던 아카시는 그냥 참지 않고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적나라한 소리에 분홍빛이던 피부가 확 붉게 변했다. 분명 얼굴도 예쁘게 물들었으리라. 아카시가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어 양손으로 느릿하게 쿠로코의 뺨을 감싸 얼굴을 들어올렸다.
아, 역시.
아카시의 눈에 들어온 건 제가 한 짓을 깨닫고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랑스런 연인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모양새에 입맛을 다신 아카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더니 두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저항 없이 작게 열린 입술 안으로 아카시의 혀가 들어가 숨어있는 작은 혀를 부드럽게 얽어낸다.
정신없이 여린 입안을 가득 헤집던 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자 아쉬운 듯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의 작은 입술을 머금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사탕을 먹듯 연신 입술을 물고 빨던 아카시의 입술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떨어졌다. 호흡을 나눈 두 사람의 숨이 거칠었다. 쿠로코는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런 쿠로코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아카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쿠로코의 손 위에 다시 쪽, 쪽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로코가 후련한 것처럼 아카시는 아카시대로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라도 표현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제 애정을 올곧이 받으며 수줍어하는 애인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선물해준 것은 보습이 잘 되는 립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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