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흑 / 청흑 / 원온원샌드 / 아오쿠로키세 / 청흑황
* 조직물 같지 않은 조직물 AU입니다.
“오셨습니까, 형님!”
우렁찬 소리와 함께 검은 양복을 빼입은 장정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는 광경은 박력이 넘치다 못해 위압감이 흘렀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움츠러들 압력이었다. 하지만 고개 숙인 장정들 사이로 휘적휘적 지나가는 키 큰 남자에게서 긴장감이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어, 그래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가락에 걸린 USB를 휙휙 돌리는 모습이 오히려 여유 만만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의 긴장한 고개가 남자의 느긋함에 풀어졌다. 빳빳함은 어디 가고 느슨해진 등허리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눈치를 보다 숙이느라 굳어있던 허리를 펴려는 찰나, 남자가 갑자기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방금 흐물하게 서있던 새끼.”
“...”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새끼라 봐준다. 다음부터 걸리면 대가리 박을 줄 알아.”
“네, 넵!”
찬물을 끼얹은듯 한 정적 속에서 눈동자만 움직여 쳐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푸르게 주위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신입은 총알같이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해 각을 잡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남자는 눈에 힘을 풀고 아까처럼 휘적휘적 걸어가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 양쪽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초 두 명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남자는 손가락을 까딱여보이곤 푹신해 보이는 검정색 가죽 의자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세트로 보이는 큰 책상 위에는 잘 닦여서 반들반들한 명패가 놓여있었다.
[쿠로코 테츠야]
검정 가죽 의자의 주인 이름이었다. 남자는 보초들을 향해 한 번 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보초 한 명이 아까처럼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남은 한 명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뭐야?”
“...”
“나가라는 소리 못 들었냐?”
“...”
“이 새끼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남자가 의자를 세게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힘없이 팽개쳐져 느릿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는 성큼성큼 보초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보다도 좁은 거리까지 바싹 다가간 남자의 큰 키와 덩치에 비해 보초는 작고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는 낮게 읊조렸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새끼야. 그러자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보초가 손을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아-, 아. 혹시 모르잖아, 테츠.”
“됐다구요.”
“흐응. 이렇게 붙어있으니까 좋지 않아?”
남자가 테츠에게 좀 더 다가가 붙어 양손으로 엉덩이를 꾹 잡아당겼다.
“하나도 좋지 않은데요. 떨어져주시죠.”
“쯧, 앙탈은.”
“앙탈 아닙니다.”
알았어, 예쁜이. 한쪽 눈을 찡긋한 남자는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테츠는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 쪽의 구겨진 바지를 탁탁 털어 정리하고는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뱉고는 그 옆에 다가가 섰다.
“이게 그 자료입니까, 아오미네 군?”
“엉. 근데 테츠. 여기에서까지 이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 애들은 괜찮았잖아.”
테츠는 아오미네가 들고 온 USB를 노트북에 연결하며 대답했다.
“어디서 말이 새어나갈지 모르잖아요. 최근 다른 조직들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신입들 중엔 아오미네 군이 제 이름가지고 활동한다는 걸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을텐데. 미리 조심하자는 차원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불편하단 말이지.”
“뭐가요.”
“예전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뽀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기다려야 하잖아. 연기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저를 상대로 가볍게 장난치는 거 이제 그만두세요. 아무한테나 그러면 욕먹습니다.”
“뭐 어때~ 나만 좋으면 됐지. 테츠도 싫은 건 아니잖아?”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여기 적혀있는 게 사실인가요?”
쿠로코의 물음에 빙글빙글 웃던 아오미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사실이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사뭇 어두웠다. 아오미네의 손가락이 노트북에 띄워진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도. 이쪽 한 군데, 저쪽 한 군데 이런 식으로 끄트머리만 가져가길래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막상 모아놓고 보니 녀석들한테 먹힌 가게가 제법 돼. 치고 오는 속도가 존나 빨라. 이 정도까지 영향력 있는 애들은 아니었는데 윗대가리가 바뀌었다나봐. 머리가 여간 좋은 게 아냐.”
“그렇군요. 게다가 이 가게를 뺏은 걸 보니 어디를 노리는지 예상이 가네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구역 중 가장 수입이 많은 지역이겠죠. 뺏기면 곤란하겠습니다.”
“하, 근데 먼저 쳐들어갈 구실이 없어. 그냥 싸워서 이기면 가질 수 있는 곳만 교묘하게 가져가고 있잖아. 곧 노른자 구역까지 치러 오겠지만. 씨발. 뱀 같은 새끼. 그전에 다 쳐부수자, 테츠.”
쿠로코 테츠야는 대답 없이 노트북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아오미네가 옆에서 채근댔다. 응? 테츠으. 간만에 몸 좀 풀자. 근질근질해. 엉? 테츠! 테...!
“이상하네요.”
“엉? 뭐가.”
쿠로코의 손가락이 제법 수입 금액이 큰 가게를 가리켰다.
“이 가게, 오기와라군 담당 아닌가요? 제법 중요한 곳이라서 밑에 아이들을 쓰지 않고 부러 배치시켰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 녀석, 싸움 제법 하는데 말이야.”
“좀 더 자세히 알아봐주세요. 내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가게에 도청기 같은 게 설치되어있는지. 아무거나 좋습니다.”
알았어. 대답하는 아오미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밤 늦은 시각, 침실의 흐릿하게 불이 켜진 침실엔 두 명의 그림자가 얽힌 채 어른어른 거렸다.
“흐, 아오미네, 군...! 이럴려고 부른 거 아니잖, 습니까...! 읏!”
“조금만. 끝나고 말해도 안 늦어.”
쿠로코가 아오미네의 집에 찾아온 건 아오미네가 저번에 말했던 걸 알아냈다고 얘기한 까닭이었다. 쿠로코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아오미네가 끌어안고 입을 부비며 침실로 밀어넣을 걸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터였다. 아오미네는 침대에 쿠로코를 눕히고 본격적으로 몸 위에 올라타 하얀 와이셔츠를 잡아 뜯었다. 바지는 이미 벗겨져 거실에 팽개쳐진지 오래였다. 쿠로코가 눈가를 찡그리며 소리쳤다.
“아오미네군!”
“테츠, 나 급해. 우리 오래 안 했잖아. 응?”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끌어안아 얼굴을 부비작거리며 애원했다.
“한 번만... 끝나고 바로 말할게.”
응? 응?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애처롭게 바라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는 한숨을 쉬며 체념한 듯 몸에 힘을 뺐다.
“한 번만입니다. 넣고 싸면 끝이에요. 알겠습니까?”
쿠로코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면서도 얌전히 눕자 아오미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금 몸에 코를 박았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쉬어 체향을 음미하면서 옆구리 부근을 문지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테츠, 다 씻었으면 이리와.”
아오미네가 젖은 몸으로 대충 속옷만 주워입은 채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됐습니다. 쿠로코는 샤워가운을 여미며 침대 끝 가장자리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매정하긴. 아오미네가 툴툴거렸지만 쿠로코는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저번에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말이야. 테츠 말이 맞았어. 쥐새끼 한 명이 있더라고. 그쪽에서 그냥 간간히 묻는 거만 대답해주면 짭짤하게 쳐주겠다고 했나봐. 오기와라 가게도, 다른 곳도 다 조금씩 손댄 모양이야.”
“간도 크네요. 아오미네군이 있는데.”
“엉, 그래서 내가 조졌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끼가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는 새끼잖아. 잘했지?”
“잘했습니다.”
씩 웃으며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는 피식 웃으며 돌아갈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다시 와이셔츠에 팔을 꿰는 찰나, 근데..., 아오미네가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쿠로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거기 보스라는 놈이 널 만나고 싶대.”
“...? 저를요?”
“정확히는 ‘쿠로코 테츠야’ 겠지. 아마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쪽이랑 할 말이 있다고 전해라고 했다던데.”
“뭐... 그렇습니까. 평소대로 아오미네 군이 저인 척 하고 가면 되는 거잖아요. 저도 부하인 척 같이 가면 되잖습니까.”
“그게 좀 문제야.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어. 아무도 없이. 만나는 장소는 우리가 정해도 상관없대.”
그리고... 아오미네가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느낌이 안 좋아.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쁘단 말이지.
“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오미네 군은 평소대로 행동하세요.”
“그리고?”
“만나는 곳은 테이코로 하죠. 접대가 제법 괜찮으니까요. 여자들을 몇 명 넣을테니 거절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오미네군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제가 들어갈 방법은 알아서 생각하겠습니다.”
“... 씁. 그래.”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얘기가 끝났다는 듯 다시 옷을 입는 쿠로코 때문에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찜찜한 듯 아오미네가 입을 쩝쩝 다시는 사이 쿠로코는 어느새 반듯하게 옷을 다 차려입고선 방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데려다 줄까, 자기야?”
오래 고민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금방 찜찜함 따위 우주로 날려보낸 아오미네가 실실 웃자 쿠로코가 정색했다.
“꺼지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 말고 애인이랑 이런 짓 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난 테츠랑 하는 게 좋은데. 테츠 엉덩이는 말랑말랑해서 좋아.”
흐흐, 아오미네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양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잡고 주물거리는 시늉을 했다. 쿠로코가 조용히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잡아 들어 아오미네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제법 큰 소리가 나자 쿠로코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테츠으!!!”
아오미네의 애타는 외침만이 빈 거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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