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흑] 안식 (1)

단편 2015. 10. 21. 23:07


*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국가를 지켜주는 문이자 궁으로 들어가는 문. 남들이 그렇게 높디높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궐문은 어린 쿠로코에겐 목이 빠질 만큼 고개를 들어야하긴 해도 심리적으로는 그렇게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서 열리기를 바랄 뿐.

 

   "그렇게 황태자 전하가 좋으냐, 테츠?"

 

   형들에게는 엄하고 엄하시지만 저에게만은 한없이 따뜻한 아버지가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쿠로코가 방긋 웃었다.

 

   "좋습니다. 저는 남자인데도 늘 예쁘다, 어여쁘다 해주시는 분입니다."

 

   쿠로코는 아버지를 따라 작은 손으로 꼭 붙잡고 종종 놀러가는 궁이 참 좋았다. 저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문이 열리고 나면, 늘 자신을 반겨주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간간히 쿠로코를 데리고 등청할 때면 폐하께서도 친히 왕세자 저하의 손을 붙잡고 문 언저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처음 궁을 방문했을 땐 성은에 감읍하다, 허리를 숙이는 아버지의 옷자락 뒤에 숨어 쿠로코는 댕그란 눈만 데굴데굴 굴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고 계신 폐하의 기백에 눌려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여 더듬더듬 인사를 하니, 마냥 귀여웠던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손길에 확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그 때. 숙인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건 제 손보다 한 뼘 정도 커 보이는 까무잡잡한 손이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손과 같은 피부색의 다부진 얼굴, 장난기 주렁주렁 달린 눈매. 저보다 조금 큰 키, 그리고 씩 웃는 얼굴.

 

   쿠로코는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작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흠칫, 정신을 차리니 소년이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젓곤 허리를 숙여 쿠로코를 마주보았다. 쿠로코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지그시 지켜보던 소년이 입꼬리를 더 올려 웃으며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난 아오미네 다이키, 장차 이 나라의 주인 될 사람이다.”

 

   쿠로코가 머뭇거리자 아오미네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깨지고 말랑한 흰 손이 제 손을 답싹 잡아오자 아오미네의 눈매가 만족스러운 듯 가늘어졌다. 잘했다는 듯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쿠로코는 그저 웃어주는 아오미네가 겨울날 따사로운 햇빛보다도 마냥 눈부신데다가, 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이 강하고 단단해 홀린 듯 양손으로 한껏 붙잡았다. 울렁이는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더 방문한 궁에서, 아버지 옷자락을 놓고 아오미네의 손을 잡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둘은 아오미네가 머물던 거처의 뜰에서 자주 놀곤 했다. 겨우내 한껏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새로운 생명이 움틀 때 즈음, 쿠로코는 평소처럼 아오미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오미네가 옷자락에 손바닥을 슥슥 문대고 쿠로코의 작은 손바닥을 감싸듯이 쥐었다. 아오미네의 손은 첫 만남 때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따듯한 봄바람이 둘의 뺨을 간지럽혔다.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벚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다. 보러가지 않으련?”

 

   “좋아요.”

 

   종종걸음으로 좇아간 뒤뜰에는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양 팔을 뻗어 껴안아도 모자랄 듯 한 커다란 나무에 하이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을 쿠로코는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아오미네가 웃었다.

 

   “맘에 드느냐.”

 

   “예, 저하. 벚꽃이 정말 예쁩니다!”

 

   벚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지 않게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코에 아오미네가 다시금 낮게 웃었다. 쿠로코는 신이 나 나부끼는 벚꽃 잎 사이로 뛰어들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꽃잎을 좇아 사뿐사뿐 발을 놀리는 모습이 작은 나비인 양 사랑스러웠다. 잠깐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아오미네도 꽃잎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쿠로코가 허릴 숙여 꼬물꼬물 무언가를 집어 들고 아오미네에게 다가왔다. 쑥쓰러운 듯 한동안 등 뒤에 감추고 머뭇거리다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벚꽃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가지였다. 놀란 아오미네가 눈을 크게 떴다.

 

   “나에게 주는 것이더냐.”

 

   끄덕끄덕. 눈을 꼬옥 감은 채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흔드는 쿠로코가 참으로 사랑스러워 아오미네는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흠칫 놀라던 쿠로코가 잠시 후 얌전히 팔을 들어 허릴 껴안고는 꺾은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며 품 안에서 웅얼거렸다. 오랫동안 궁에서 살며 만나보지 못했던 순수하고 맑은 영혼.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욕심이 났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아오미네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작은 몸은 더 가까이 안겨왔다.

 

   “옆에 있거라.”

 

   “…?"

 

   “평생 내 옆에 있어.”

 

   “저하…?”

 

   “내 나중에 가지에 손이 닿을 만큼 자라면 더 좋은 가지를 꺾어다주마. 그러니 내 옆에 있거라.”

 

  순진한 아이는 말속에 숨은 음험한 소유욕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구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오미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송보송한 살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는 눈매에 빛이 번쩍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소년과 아이는 부쩍 자랐다.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사내의 티가 풀풀 났다. 어깨는 늠름하게 벌어지고, 처음 만났을 때 한 뼘 정도였던 키 차이는 훌쩍 벌어져 1척이 되었다. 늘 아이는 왜 차이가 줄어들지 않냐고 입을 내밀며 가끔 투정을 부렸지만 아오미네에겐 그 모습도 그저 어여쁠 뿐이었다.

 

  “좋지 않으냐. 너를 이리 한품에 안을 수 있고. 나는 테츠가 더 자라지 않았음 좋겠구나.”

 

   하하, 웃으며 자신을 품에 안으려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얼굴을 붉힐 뿐,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쿠로코는 자라면서 감정표현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방긋 웃는 웃음보다도 잔잔히 입가에 미소만 걸치는 일이 많아졌는데 아오미네는 그게 아쉬워 부러 방금처럼 과장된 행동이나 말을 하곤 했다. 쿠로코는 핀잔을 주면서도 노력에 답해주듯 아침 햇살처럼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평생 옆에서 볼 수 있다면, 아오미네의 바람은 소박하면서도 사치스러웠다.

 

   낮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뒤뜰에 잔디가 푸르게 자라 미지근한 바람에 흔들릴 때면 쿠로코는 잔디 위에 앉아 책을 읽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집안의 자제답게 또래들은 어렵다, 혀를 차는 책도 끝까지 붙잡고 읽어나갔다. 집중할 때면 자신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만 뚫어져라 보는 쿠로코의 곁에서 아오미네는 서운하면서도 정갈한 옆모습이 또 곱고 고와서,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숨죽여 바라보곤 했다.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불쑥 아오미네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쿠로코가 의아한 듯 아오미네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오미네가 이전의 그 얼굴 그대로 씩 웃고는 덥썩 쿠로코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당황한 쿠로코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 남들이 체통 없다 욕합니다.”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나는 곧 황제가 될 사람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날 쳐다보지도 않으니 그런다.”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문 쿠로코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오미네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뚫어져라 사랑스러운 얼굴을 응시했다. 테츠,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에 입술이 간지러웠다. 테츠. 이름이 불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눈매가 어여뻤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독점욕 가득한 시선에 쿠로코가 슬쩍 눈을 피하자 아오미네가 덥썩 쿠로코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저하…!”

 

   “쉿.”

 

   저를 부르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적당히 도톰해 구미를 돋우었다. 아오미네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정처 잃은 듯 떨리던 쿠로코의 눈꺼풀이 감겨들고,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워지다 하나로 합쳐졌다. 겹쳐진 입술이 심장이 뛰듯 욱신거리면서도 간질간질했다. 맞닿은 쿠로코의 입술이 약간은 가칠하고, 손끝엔 긴장해서 굳어진 쿠로코의 목이 느껴져 아오미네는 입을 맞댄 채 피식 웃었다. 공기가 빠지는 그 소리에 쿠로코가 번뜩 눈을 뜨더니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뒤로 빼려 움찔거리며 힘을 줬다. 하지만 여전히 붙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 덕분에 쿠로코는 동그랗게 떠진 눈과 단풍잎처럼 물든 얼굴을 고스란히 아오미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쿠로코가 눈을 내리떴다.

 

   “그만 좀 놀리세요.”

 

   “테츠가 너무 귀여운 걸 나더러 참으라고 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

 

   “아직도 제가 그렇게나 어여쁩니까.”

 

   당황한 나머지 평소에는 뱉을 엄두도 못 냈을 말을 하며 쿠로코가 눈가를 찡그렸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아오미네가 나른하게 코끝을 부비며 하늘색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어여쁘다. 홍시처럼 깨물고 싶게 달아오른 뺨도 예쁘고, 오롯이 나만 담고 있는 네 물빛 눈동자도 예쁘다. 앙증맞은 코는 귀엽고 앵두같은 입술은 먹음직스럽다.”

 

   “….”

 

   “입맞춤은 몇 번 해봤는데도 여전히 처음처럼 몸을 굳히는 네가 그냥 사랑스럽다.”

 

   다시 말을 잃고 터질 듯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무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몸을 돌려 쿠로코의 허리를 껴안았다.

 

   “네가 좋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대가 좋았어.”

 

   “….”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상대에게서 한동안 대답이 없자 아오미네가 눈만 들어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아직 붉은 얼굴을 한 쿠로코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오미네가 얼른, 속삭이듯 채근하자 쿠로코의 고개가 푹 숙여지고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왔다.

 

   “저도, 저도 저하가 좋습니다.”

 

   “….”

 

  “알면서 물어보지 마세요.”

 

   부끄러워 귓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들 생각도 않는 쿠로코를 환한 미소를 지은 아오미네가 세게 끌어안았다. 말을 들은 것뿐인데도 입안이 달달했다. 아랫것들이 수근거려도 상관없었다. 품안의 제 사람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웠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하길. 풋풋한 어린 연인은 서로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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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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