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 아카시 세이쥬로 x 비서 쿠로코 테츠야

* 약간의 캐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리 주의.

 

  - 잠시 내 방으로 올라와, 테츠야.

 

  - 알겠습니다.

 

  하아. 쿠로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옷차림을 정리했다. 직속 상사인 아카시로부터의 호출이었다. 방금까지 경쟁 회사와의 미팅을 하느라 종일 같이 붙어있어 놓고도 숨 돌릴 틈 없이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근 후 바로 다시 호출이 왔을 땐 -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쿠로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미팅에 나가기 전까지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쿠로코는 아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며 사장실로 향했다.

 

  쿠로코의 상사이자 쿠로코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사장인 아카시는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남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스펙. 능력. 아카시의 회사가 국내에서 손꼽을 만큼 대기업이 된 이유는 아카시가 실수 하나 없이 모든 프로젝트를 대성공 시켰기 때문이다. 아카시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면 실패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직원들을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겸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카시 사장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존경하면서도 경이로운 능력에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일처리를 위한 탓에 아카시는 늘 생각이 많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날이 서다 못해 사람을 들들 볶는 아카시를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들어했고 어느 순간부터 아카시의 일정 반경 내에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 몇 개월 간 아카시 옆에 붙어있는 사람이 생겼다. 새로 비서로 들어온 쿠로코 테츠야가 바로 그 사람이다. 쿠로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시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다. 사람들은 쿠로코를 신기해하며 쑥덕댔다. 쿠로코가 아카시를 좋아한다, 부터 사실은 쿠로코가 아카시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 등등의 시덥잖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쿠로코가 아카시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기분이 들쑥날쑥한 아카시가 심술을 부리는 사춘기의 십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절반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의 중학생도 안 할 짓을 하곤 하니까. 서류 순서 바꾸기라던지, 볼펜의 뚜껑 색을 바꿔놓는다던지. 아주 사소한 장난들. 아, 남들과 조오금 다른 점이 있다면 쿠로코는 아카시의 심술을 그러던지 말던지, 하고 흘려 넘길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 * *

 

  “어이, 아카시! 너, 당장 그 지랄 좀 그만두라 것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카시의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카시는 책상에 앉아 여유롭게 장기를 두다 말고 한 손을 들어보였다.

 

  “여어-, 신타로.”

 

  “여어-. 가 아니라는 거다, 여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네 비서들은 이 모양이냐는 거다!”

 

  아카시의 오랜 친구 겸 인사팀장인 미도리마 신타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카시의 책상에 소리 나게 무언가를 탁 놓았다. 아카시가 느릿하게 집어 들자 눈에 보이는 글자는 ‘사직서’.

 

  “네 비서가 또!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제발 비서 좀 그만 볶으라는 것이야. 벌써 5명이 넘어가고 있다는 거다.”

 

  아카시가 어깨를 들썩였다.

 

  “난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소한 일들을 못 버틴다는 건 그들 스스로가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 아닌가?”

 

  “그 사소함이 하루, 아니 매일 반복되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카시, 너잖아!”

 

  나는 잘못이 없는데, 하하.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해 끼치지 않아요~ 웃음을 짓고 있는 아카시를 보던 미도리마가 결국 폭발했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네 비서는 네가 알아서 뽑던지 말던지 해!”

 

  씩씩거리다 못해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책상 위로 족히 수십 장은 돼 보이는 이력서를 팽개치고는 쿵쾅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아카시는 쯧,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리곤 이력서들을 집어들었다. 두께가 상당했다.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군. 자기가 생각해도 욱하는 성격 탓에 전담 비서 자리가 하루가 멀다시피 공석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아카시의 눈가가 슬며시 찌푸려졌다. 물론 전담 비서는 자신의 가장 최측근으로서 누구보다도 오래, 꾸준히 옆에서 업무를 도와줘야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익숙해질 만하면 자기 때문에 그만두니까 화날... 수도 있겠지. 음. 아카시는 미간의 힘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시는 전담 비서가 그만둠으로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피로가 쌓여 신경이 예민해지다 보니 신타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닦달하고 괴롭게 만든다는 점에 있었다. 참지 못한 직원들의 우는 소리가 회사 홈페이지의 신문고나 직원의 소리함에 가득 찼다. 양심의 가책을 아-주 조금 느낀 아카시가 그럼 새 비서를 다시 뽑으라고 전했는데 그 말들 들은 신타로가 위와 같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가버린 것이다. 아카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이력서 뭉치를 대충 휘리릭 넘겨보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멈췄다.

 

  이름 쿠로코 테츠야

 

  나이 25세

 

  ...

 

  특이사항은 유치원 보육교사 경력...?

 

  흐응. 유치원이라... 아카시도 가끔, 아주 가끔은 직원들을 긁는 자신의 모습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유치원 교사가 오면 적당히 잘 달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아카시는 곧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경험으로 고스펙의 사람을 뽑든 저스펙의 사람을 뽑든 차피 금방 떨어져나갈 걸 알고 있었으니 새로운 실험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력서에 붙어있는 사진에 있는 유치원 선생의 말간 눈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귀찮은 일을 던져주고 간 미도리마에게 리벤지하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 삑. 나야, 신타로. 골랐어.

 

  - ... 너무 빠른데. 하지만 너의 보는 눈은 정확하니 일단 바로 면접을 보도록 하지.

 

  - 아아. 아주 적합한 인재일 거야.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아카시의 눈동자가 빛났다.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도리마는 이력서를 보다 말고 눈을 의심했다. 눈앞의 남자 - 라기 보다는 소년 - 의 볼만한 것이라고는 유치원 교사 경력뿐이었다. 공인 영어 점수도 평균, 제 2 외국어 칸은 아예 비어있고, 게다가 전공까지 상경계열이 아닌 유아교육과. 그렇다고 외모가 그리 출중한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떤 부분에서 아카시의 눈에 띈 거지? 애초에 우리 회사에 지원할만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하며 미도리마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고는 다시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쿠로코는 반듯하게 앉아 무표정으로 미도리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흐르지도 않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 같은 기분에 미도리마가 황급히 질문을 했다.

 

  “쿠로코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유치원 말고 회사에서의 경력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너무나도 빠르고 간결하게 나온 대답에 미도리마의 말문이 막혔다. 몇 초간의 정적이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미도리마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때까지 해왔던 일과 많이 다를텐데 버틸 수 있겠습니까. 유치원 일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의 수배는 힘들텐데.”

 

  “괜찮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

 

  일말의 변화도 없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코에 미도리마는 그만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곧 그만 둘 게 뻔한데 이름뿐인 면접은 봐서 뭐하랴. 다음번에는 면접도 그냥 아카시한테 떠넘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도리마가 쿠로코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쿠로코가 서명을 하는 동안 아주 소박한 소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아이들을 대할 때 필요한 인내심이 쿠로코에게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내장되어 있어서 아카시를 오랫동안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혹시나 모르지 않는가. 7살을 견뎌내는 참을성이 저 중2병 환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줄지.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아 쿠로코를 응원했다.

 

  ~ 2015, 쿠로코의 좌충우돌 비서 생활기~ 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쿠로코는 눈앞의 굳건하게 닫힌 사장실 문을 바라보다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또 어떤 방법으로 들들 볶일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대충 대꾸해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쿠로코가 노크를 했다.

 

  “사장님, 쿠로코입니다.”

 

  “나는 테츠야를 불렀는데.”

 

  ... 이 자식이. 돼도 않는 꼬투리에 살짝 울컥했으나 심호흡으로 참아낸 쿠로코가 다시 노크를 했다.

 

  “... 테츠야입니다. 쿠로코 테츠야요.”

 

  “들어와.”

 

  끼익, 거대한 문이 뻑뻑하게 열리고 드넒은 사장실 안에는 아카시가 책상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채 손등으로 턱을 받치고 앉아있었다.

 

  “어서 와, 쿠로코.”

 

  “네, 사장님.”

 

  아까는 테츠야라더니 이번엔 쿠로코라고 부르는 아카시에 쿠로코는 지금 아카시의 감정상태가 꽤나 오락가락임을 눈치 챘다. 호출할 때의 목소리가 낮아서 기분이 저조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의외로 아카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보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평소와는 달리 느슨하게 풀려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쿠로코는 뭐가 아카시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인터넷 기사를 몇 개 봤는데 말이지.”

 

  “네.”

 

  “스킨십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대.”

 

  “... 네?”

 

  “스킨십을 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순환을 감소시키고 고통을 완화하는 엔도르핀의 생성을 자극해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더군.”

 

  “그런데요?”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쿠로코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심술궂은 비아냥을 하면 그냥 네, 네 하고 달래면서 넘어가면 되는데 이렇게 나온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쿠로코가 이리저리 눈동자만을 굴리고 있자 아카시가 씩 웃었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스킨십이, 나한테도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네?”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받았지 덜 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안 그래?”

 

  “그건 맞지만...”

 

  “이런 내가 스킨십을 통해 받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봐. 내 정신 건강이 좋아지겠지?  여유가 생긴 나는 너그러울 거야. 그럼 모두의 스트레스도 줄어들 테니 결국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 회사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거지.”

 

  “그것도 맞긴 한데...”

 

  일단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니 부정은 않는데 저 말을 꺼낸 의도가 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쿠로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시가 쿡 웃었다.

 

  “지금 테츠야의 얼굴 굉장히 바보 같아.”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다니 테츠야도 좀 혼란스럽긴 할 거야.  이해해.”

 

  평범한 두뇌라는 게 그렇지 뭐, 따위의 말을 뱉으며 생긋 웃는 아카시에 쿠로코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쿠로코였다가 테츠야였다가 다시 쿠로코였다가 테츠야가 된 호칭같은 건 이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본론이 뭔가요. 표정보다도 더 영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회사의 발전을 위해 스킨십으로 내 스트레스를 줄이자 이 말이야.”

 

  “아... 하하, 그것 참 좋은 방법이네요.”

 

  는 무슨!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다짐한 쿠로코가 아카시의 다음 말이 끝나면 바로 파이팅입니다, 하고 말해야겠습니다, 생각하는 찰나 아카시가 그 어떤 누구보다도 해사하게 웃으며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렇지? 자, 이리 와, 테츠야.”

 

  “?!”

 

  “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도무지 가지 않는 쿠로코가 경악했다.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고 아카시만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아카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쿠로코는 충격이 컸는지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있었다. 아카시는 얼마 없는 인내심을 십분 발휘 해 팔을 벌린 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쿠로코는 여전히 그 표정 그대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그렇게까지 설명해줬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생각보다 둔하구나, 테츠야는.”

 

  아카시가 눈을 내리깔며 슬며시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부석이 된 쿠로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쿠로코를 꽉 끌어안았다. 쿠로코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질리도록 봤던 아카시의 디올 정장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보라색 넥타이와, 형광등에도 반짝이는 루비가 박힌 넥타이핀. 안기는 그 순간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아카시의 코롱 냄새.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아카시의 팔. 그리고 당장 이마가 닿은 아카시의 가슴 근육. 아카시의. 아카시의. 아카시의.

 

  인간의 오감 중 세 가지 감각이 모두 아카시에게 잠식되고 나서야 쿠로코는 자신이 아카시의 품에 빈틈없이 가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쿠로코가 뒤늦게 밀어내려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아카시는 더 세게 끌어안을 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무슨...!”

 

  얼굴이 붉어진 쿠로코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 듯 입을 열자 아카시가 한쪽 팔로 쿠로코의 머리를 감싸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후, 귀에 낮은 숨을 불어넣으니 쿠로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신선한 반응에 아카시가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잦아들고, 아카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쿠로코의 청각을 점령했다.

 

  “어디 한 번 스트레스를 줄여보자고, 내 비서님.”

 

  그 순간 쿠로코는 온몸으로 직감했다. 앞으로 이 예측 못 할 사장이 자신의 감각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지배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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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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