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이코 시절의 아오미네 X 쿠로코
* 계절 날조 (아마도...)
* 아오미네 캐붕 주의
* 부디 BGM - 뚝뚝뚝 과 함께 즐겨주세요.
비가 올 것 같다. 곧 장마가 시작할 거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뉴스가 문득 기억이 났다. 일어나자마자 코끝에서 나는 특유의 비 내음이 달갑지 않았다. 학교 째길 잘했나, 침대에서 까치집인 머리 그대로 멍하게 생각했다. 벌써부터 다리에 닿는 얇은 여름 이불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 해 다리를 휙휙 휘저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훌쩍 짧아져 덮어도 발가락이 서늘한 이불이었다. 키가 컸다고 자랑하러 뛰어갔던 날,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웃으면서 쑥쑥 길어지는 다리가 부럽다고 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하얗고 말랑한 테츠 다리가 좋아.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등 뒤로 쑥 들어왔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네 속의 열등감의 키가 자랐던 건 아닐까.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까 싶다. 내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순 없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너랑 멀어질 줄도 몰랐다. 다 내 탓이었다. 요즘 연습에 나오질 않네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무룩한 건 잘도 알았으면서 이렇게 후회하는 걸 보니 나는 아호미네가 맞다.
잘 웃지 않는 너였지만 그렇게 우울한 감정을 티내는 너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날 보는 테츠는 늘 조심스럽고 불안한 눈을 하고 있어서 괜히 더 심술이 났다. 테츠가 아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나에게. 그까짓 연습 손잡고 가주는 게 뭐가 어때서 버팅기고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다. 갔었다면 몇 번 공을 튕기다가 말아서 테츠를 더 슬프게 만들었을 거야. 아악. 아무것도 모르겠다. 와아악 헤집은 머리가 더 까치집이 됐다.
생각하지 말자. 천장을 따라 의미 없이 시선을 움직이는데 벽에 붙여진 농구 선수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농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 더 강한 라이벌을 만나고, 깔끔하게 이겨버려서 반짝거리는 금빛 트로피를 거머쥘 줄 알았는데. 여긴 어디? 내 방 침대. 농구? 시시하고 재미없음. 나를 이기는 건 나뿐인데 매번 받을 트로피가 무슨 상관이야. 쳇. …… 농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에라이. 이상해진 마음에 반대편으로 홱 돌아누웠더니 책상에 놓인 다른 선수의 피규어가 보인다. 정면으로 보이는 피규어 신발 밑창을 보고 있자니 테츠가 농구화 밑창이 다 닳아서 새로 구매해야 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저 선수의 이름을 땄다고 그랬나? 같이 사러 가지 않겠습니까, 묻기에 냉큼 좋다고 대답했는데 약속했던 날에 비가 와서 못 갔었지. 다 사고 마지바에라도 갈까 했는데 아쉽네요. 응, 그러게. 둘 다 미련이 그득그득 담긴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아, 나 또 테츠생각 하잖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로 누웠더니 아까는 몰랐는데 천장 벽지 무늬마저 농구공이다. 여기도 농구, 저기도 농구. 농구 생각 아니면 테츠 생각. 저기요, 아호미네 다이키 머릿속의 뇌 님? 다른 건 생각 못합니까? 일 좀 해라, 이 새끼야…. 짜증나는 마음에 침대 위에서 마구 버둥거렸더니 매트릭스가 방방 울린다. 나 뭐하는 거냐…. 엎드린 자세로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습도가 높아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다.
그대로 습한 숨을 내뱉고 있자니 배가 고파져서 벌떡 일어났다. 원래 기분 꿀꿀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최고다. 사실 제일 좋은 건 마이쨩 누나지만 지금은 아침 - 아니 점심 - 이니까 고이 접어뒀다. 비척비척 밖으로 나왔더니 아무도 없어서 집이 조용했다. 부엌으로 가봤더니 그래도 아들이랍시고 챙겨주는 엄마의 메모가 보인다.
[냄비에 육개장 있으니까 데워먹어.]
오, 나이스. 신난 마음에 얼른 냄비 뚜껑을 열었더니 보이는 건 냄비에 딱 맞게 들어가 있는 다름아닌 육개장 컵라면. 엄마…. 아들을 이기는 건 아들이 아니라 엄마였나봐…. 먹지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배고픔에 아우성을 내는 위장의 강력한 저항에 이기지 못하고 육개장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허탈한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뚜껑을 뜯는데 힘조절에 실패했는지 뚜껑이 조금 찢어졌다. 쯧, 대충 물을 붓고 접시로 덮어두면 되니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오늘따라 찢어진 부분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괜히 만지작거리며 찢어진 티가 안 나게 손가락으로 붙여보는데도 티가 난다.
절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뚜껑을 보고 있자니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또 테츠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매만져도 붙지 않는 뚜껑이 꼭 멀어져버린 자신과 테츠의 미래 같아서 입이 썼다.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웃겨서 아오미네는 덜 익은 육개장을 와작와작 삼키듯이 씹어 먹었다.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먹어 텅 빈 육개장 그릇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니 빗소리가 들린다. 눈 떴을 때부터 그렇게 물냄새가 나더라니 결국 비가 쏟아진다. 아까 센치해졌던 것도 다 비가 올 날씨여서 그랬나보다. 애초에 날씨에 좌우되는 자신도 아니었지만 한창 예민할 나이이니만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창밖을 보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죽죽 내린다. 테츠는 우산 챙겼을까. 맨날 늦잠 자고 머리 정리한다고 우산 챙기는 거 잘 깜빡하는데.
몇 십분 전에 일어나 이리저리 뒤집힌 머리를 하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사실 테츠는 우산이 없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그대로 비를 맞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비 맞으며 하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면서. 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그것도 그렇다 싶어서 충동적으로 손을 낚아채 빗속으로 뛰어든 적이 있다. 후끈한 공기에 미지근해진 비가 온몸에 쏟아져 내려 금방 다 젖어버리고 말았지만 식어버리는 체온 속에서 맞닿은 손바닥으로 느껴졌던 뜨뜻한 온기가 아직도 저릿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당시엔 드라마라도 찍냐,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회상하니 드라마만큼이나 눈부신 추억이었다. 다음날 테츠가 감기에 걸려 나타난 건 유감이었지만. 그 이후로 둘 다 우산을 깜박한 날에는 무조건 내 재킷이나 셔츠를 뒤집어쓰고 가까운 마지바까지 달려가곤 했다.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이 좁은 셔츠 아래에서 테츠 어깨를 끌어안았을 때의 감촉은 마치 테츠와 나 둘만 남겨진 세상처럼 아득해서 한 손에 들어오는 어깨를 더 세게 붙잡을 때도 있었다.
아, 생각하고 있자니 테츠가 보고 싶다. 흘깃 시계를 보니 벌써 학교가 끝날 시간이었다. 어지간히 늦게도 일어났다. 아마 연습도 흐지부지돼서 미도리마 말고는 거의 다 빠질 테니 지금 힘껏 달려가 운이 좋다면 테츠랑 마주칠지도 몰랐다. 아니, 만날 게 분명하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며칠 만에 만나 얼마나 어색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었지만 그것보다도 테츠를 만나고 싶었다. 가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한 아오미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라면 국물이 튄 옷을 벗고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현관으로 뛰어갔다. 아, 그 전에 머리에 대충 물칠하고 양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함빡 젖은 수국 꽃잎에서 빗방울이 습하게 묻어나온다. 장마라 그런지 공기가 눅눅하고 무겁게 달라붙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렇게나 안 움직이던 다리가 결심하고 나니 이렇게 쉽게 움직였다. 탁탁탁탁, 달리는 발밑에서 튀어 올라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는 빗방울이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선사한다. 가슴께에서는 뜀박질만큼이나 세찬 박동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활기를 내뿜는 몸이 낯설고, 반가웠다. 나중은 어떻게 돼도 좋아. 일단 테츠한테 가는 거로도 충분해.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이 코너만 돌면.
“헉, 헉. 테츠…!”
거 봐. 내가 뭐랬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비로 뿌연 시야 사이로 막 교문을 빠져나온 작은 몸이 보인다. 가빠진 숨소리와 귀를 울리는 빗소리,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눈앞의 테츠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축 쳐진 안쓰러운 어깨가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이 안아줄 테니까.
“집에 같이 가자-!”
“아오, 미네, 군….”
“마지바도 가자! 내가 바닐라 쉐이크 사줄게!”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테츠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싫어졌나? 힘차게 들었던 손을 엉거주춤하게 내리자 훅 밀려드는 서운하고 멋쩍음에 먼 산을 보며 볼을 긁적거리는 찰나,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테츠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뛰어와 답싹 허리를 끌어안았다. 허리로 전해지는 작은 떨림과 갑작스런 열기에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테츠를 끌어안았다.
“미안. 보고 싶어서 왔어.”
“….”
“테츠?”
“… 제일 큰 사이즈로 안 사주면, 화낼 겁니다. 바닐라 쉐이크.”
나는 대답 대신 손에 꼭 쥐고 왔던 셔츠를 테츠 머리 위로 둘러주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드라마의 또 다른 한 장면을 찍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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