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생 적흑
쿠로코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오늘은 대망의 조별과제를 하러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아카시와의 약속은 번호를 주고받았던 날부터 한참 뒤인 11월이었다. 대학생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카시는 중간고사 기간까지 일정이 아주 꽉 잡혀있었다. 아카시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밥을 먹다 아카시랑 한 조가 됐다는 말을 이제야 카가미에게 해줬더니 그 둔한 카가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왜 이제야 이야기 하냐며 그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해줬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아카시가 국내 최고 기업인 ‘아카시’의 아카시라는 것, 전 학기 평점 4.5를 유지하며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같이 과제를 하게 되면 수준 차가 어마어마해 같은 조원들이 고생을 제법 한다는 것까지. 대강 학교에서 퍼진 소문에 대해 듣게 된 쿠로코는 입맛이 뚝 떨어져 더 이상 바닐라 쉐이크를 마시지 못했었다.
“저 괜찮을까요…….”
“힘내. 어떻게든 지나갈 거야.”
쿠로코는 전혀 힘이 생기지 않는 말을 위로랍시고 뱉는 매정한 동기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다 테이블에 엎어졌다. 다른 사람 얘기에 무관심했던 지난날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될 줄이야.
그 때를 회상하던 쿠로코가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생각해봤자 뭐해. 이미 약속은 잡았고 그 약속은 오늘인 걸. 그리고 조금 쫄았던 첫인상 및 소문과 달리 카톡에서의 아카시 선배님은 배려 깊고 상냥하셨으니까……. 결의를 다진 쿠로코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옷을 몸에 대보았다. 혹시나 선배님한테 복장이 불량하다는 이유 등으로 밉보일 순 없지.
“미리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자신은 꾸미는 것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생 때까지 농구에만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옷은 편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의 소유자여서 대학 입학 전까지 옷장에 있는 옷이라고는 운동복이 다였다. 그나마 입학 전에 모처럼 만난 중학교 동창인 키세가 옷이 이게 뭐냐며 쇼핑몰로 끌고 가준 덕에 그럭저럭 봐줄만한 옷 몇 벌을 살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유명 잡지를 시작으로 데뷔한 키세는 패션 감각이 좋았다. 쿠로코한테 잘 어울리는 옷을 잘 찾아줬다는 소리다. 그런데 모델은 모델인지, 남들은 기피할 과감한 선택을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9월에 한창 자주 입고 다녔던 노란색 후드티도 그의 선택이었다. 편해서 자주 입긴 했지만…….
그 ‘아카시’ 선배님을 만나는데 후드티만 달랑 입고 갈 순 없었다. 학교도 아니고, 밖에서 보는 거니까. 아카시를 수업 시간에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같이 앉지도 않았고 눈이 마주칠 때 간단하게 목례만 한 게 다였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는 거니 좀 단정하게 입는 게 좋지 않을까 고심하던 쿠로코는 하늘색 면 셔츠에 민트색의 도톰한 가디건, 흰 바지를 입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엔 최선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리한 쿠로코는 현관을 나섰다.
“와아…….”
매표소 앞에 도착한 쿠로코는 순간 내가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카시 선배님은 오늘 데이트가 있으셨던 건가? 여자 친구에게 보낼 카톡을 나한테 잘못 보내셨나? 쿠로코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표를 뽑은 듯한 아카시는 평소 강의 때와는 달리 머리를 까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마마저 저렇게 잘생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쿠로코는 조금 슬퍼졌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은색 정장은 마치 아카시를 위한 옷인 것처럼 완벽한 핏을 자랑했다. 물론 수트 아래, 아카시의 몸매가 탄탄한 탓이기도 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와이셔츠와 부드러워 보이는 넥타이는 보통 좋은 소재가 아닌 듯했다. 마치 새것인 냥 흠집 하나 없는 가죽구두가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만나러 저렇게 입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쿠로코는 계속 망설이며 아카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어떡하지.
“안녕.”
“헉.”
용케 쿠로코의 위치를 알았는지 쿠로코와 시선이 마주친 아카시가 뚜벅뚜벅 쿠로코의 앞으로 걸어왔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한 향기가 아카시의 걸음을 따라 아찔하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어, 저……. 새삼스럽게 목소리도 너무 잘생겼잖아. 쿠로코는 그만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쿠로코의 행동에 아카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 가까이 성큼 붙었다.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아니, 아니에요. 안 아파요. 근데 선배님…….”
“음?”
“오늘 저랑 한 약속 오신 거 맞아요?”
얘가 이걸 진심으로 묻고 있나, 싶은 표정으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던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도 나온 거 아닌가?”
“아니, 맞는데, 맞는데요……. 너무 멋지게, 하고 오셔서요.”
내가 생각해도 진짜 어이없는 질문이다……. 아카시의 표정에 아차, 싶은 쿠로코가 입술을 말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약속도 기억 못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마른 침을 삼킨 쿠로코가 조심스럽게 아카시의 눈치를 살폈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카시는 제법 기분이 좋아보였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도한 쿠로코가 아카시 몰래 숨을 내쉬었다.
“나 멋져?”
“네? 네.”
“다행이네. 오늘 너랑 만나니까 신경 써서 나왔거든.”
왜요? 라는 물음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쿠로코는 묻지 않았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란해진 쿠로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표를 건네며 말했다.
“팝콘 먹을래?”
“어……, 괜찮은데.”
“그럼 콜라?”
“…… 바닐라 셰이크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던 아카시가 풋, 웃었다.
“바닐라 셰이크 좋아하나봐? 알았어. 여기서 잠깐 기다려.”
“네.”
아카시는 팝콘을 사기 위해 빙글 돌아 걸어가는 것까지 우아했다. ‘gorgeous(고져스)’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환생하면 저런 느낌일까. 자기도 모르게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쿠로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쿠로코랑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다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는 되게 멋진 사람이구나. 잘생긴데다 상냥하기까지 해. 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던 아카시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 쿠로코는 애꿎은 영화 티켓의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무슨 생각해?”
불쑥, 눈앞에 붉은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화들짝 놀란 쿠로코가 이상한 자세를 취하자 아카시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하는 거야. 머쓱해진 쿠로코가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니에요.
“자, 여기 바닐라 셰이크.”
“감사합니다.”
차가운 바닐라 셰이크를 잡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티켓을 들어 상영관을 확인하려는 찰나, 부드럽게 손목을 쥐어 잡은 아카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야.
순간 쿠로코는 다시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는 줄 알았다. 선배가, 아카시가 잡은 손목이 화끈거려서 화상을 입는 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정신으로 상영관에 도착해 자리를 찾아 앉았는지 모르겠다. 쿠로코는 등받이에 제대로 기대지도 못하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 앉았다.
반면 아카시는 여유롭게 다리까지 꼬아 앉아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젊은 재벌 2세가 사장실에 앉는 자세 같다고, 쿠로코는 멍한 머리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과제에 쓸 말이 많을 텐데.”
“그러게요.”
쿠로코는 아무 말이나 대답하며 스크린에만 눈을 박았다. 무의식적으로 셰이크를 쪽쪽 빨다보니 금방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다행히 아카시는 그 후로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 영화도 계속 보다보니 흥미진진했다. 쿠로코는 영화에 흠뻑 빠진 채 아까보다 편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팔걸이에 슬쩍 걸치고 있던 쿠로코의 팔뚝에 무언가가 닿았다.
“……?”
아카시의 팔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 봤다가 시야에 들어온 상황에 쿠로코가 다시 허리를 바짝 세우며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할까? 팔을 뺄까? 그랬다 선배님이 기분 나빠하시면 어떡하지? 애초에 팔 좀 닿았다고 피하는 게 일반적인가? 멘붕에 빠진 쿠로코가 겨우 눈동자만 굴려 쳐다본 아카시는 팔이 닿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와 별 다른 점이 없어보였다. 그래, 가만히 있자.
쿠로코는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영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적어도 아카시의 팔이 거기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쿠로코는 다시 영화에 푹 빠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아카시의 팔이 점점 더 닿아왔다. 아니, 기분 탓 아닌 것 같아. 어느 새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아카시의 팔과 쿠로코의 팔이 딱 맞붙었다. 아, 이제 영화고 뭐고 모르겠다. 그냥 빨리 영화가 끝났으면 좋겠는데.
너무 신경을 써 마비가 온 것 같은 팔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쿠로코는 간절히 빌었다. 아카시랑 닿아있는 부분이 뜨거웠다. 그 열기가 넘실넘실, 넘치다 손까지 차올랐다. 쿠로코는 침을 꿀꺽 삼켰고, 아카시는.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아카시가 느껴지는 순간 쿠로코는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아카시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시야로 들어오는 건 아까와 달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빛을 내는 아카시의 눈동자.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쿠로코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아카시가 쿠로코의 손을 잡아 끌어와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상대의 얼굴이 제법 볼 만 했다. 아카시 입맛을 다시며 쿠로코에게 말없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나갈래?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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