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퀘박스 요청 - 대학 졸업 후 달달하게 동거하는 사업가 아카시 x 보육교사 쿠로코
으, 더워. 엘리베이터에도 에어컨을 설치해달라고 할까. 그러게 테츠야가 고집 부려도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야했는데. 시원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하면서 탄 엘리베이터의 공기는 바깥과 똑같이 후덥지근했다. 아카시는 몸을 비틀며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와이셔츠의 목깃을 손가락으로 떼어냈다. 곧, 집에 도착한다.
“으아, 시원하다.”
“다녀오셨어요, 아카시 군.”
“다녀왔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마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출근하기 전, 더우면 참지 말고 꼭 에어컨 켜고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얌전히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쿠로코가 웃으며 아카시를 맞았다. 쾌적한 온도에 저를 반겨주는 사랑스런 애인.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불쾌함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노란 앞치마를 걸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쿠로코는 아주 귀여웠다. 아카시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저녁 준비 하고 있었어?”
“네. 에어컨 켰으니까 아카시 군이 좋아하는 탕두부나 먹을까 하고.”
“헉. 좋아.”
“씻고 와요. 나는 아까 오자마자 씻었습니다.”
“응.”
웬일로 조용히 대답하기에 바로 씻으러 가나 싶었는데, 쿠로코의 뺨에 따뜻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꾹 닿았다 떨어졌다.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허리에 상대방의 팔도 감긴 채였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쿠로코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다. 아카시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카시 군!”
“아니, 뽀뽀를 몇 년 째 하는데 아직 부끄러워해?”
“아무 생각 없이 있는데 하니까 그렇죠!”
“그럼 지금 또 해도 돼?”
“빨리 씻기나 하세요!”
“네, 네.”
쿠로코의 손에 떠밀려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아카시는 즐거운 기색이었다. 장난기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저한테는 소년같이 구는 아카시였다. 이제 진짜로 씻나 싶었는데 아카시가 아차, 하며 뒤돌았다. 쿠로코가 재빨리 아카시를 쳐다본다.
“이번엔 또 왜요.”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겼어.”
“아,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고마워.”
서랍 안에는 보송하게 말라 가지런히 개어진 빨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사실 집안일은 두 사람이 돌아가며 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카시의 일은 너무 바빴고 어쩔 수 없이 웬만한 일은 다 쿠로코가 하게 되었다. 아카시는 적절하지 못한 분배에 계속 미안해했지만 쿠로코는 솔직히 정말로 괜찮았다. 제 손으로 빤 - 물론 세탁기가 하지만 어쨌든 자기가 세탁기 안에 넣으니까 - 옷을 입고 출근하는 아카시라든지, 손수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아카시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아카시가 씻으러 들어가고 쿠로코는 저녁 차리기를 마무리했다. 쿠로코도 일을 다니다 보니 늘 집안일에 신경 쓸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카시는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너저분해지지 않게 정리해주시는 아주머니를 부를 수 있었다는 소리다. 결국 상차림의 마무리는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오이소박이 같은 기본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고, 제가 육수를 내 마트에서 사온 두부를 담가 끓인 탕두부를 작은 화로위의 뚝배기에 옮기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 2공기까지 나란히 식탁에 올라간다.
혹시나 아쉬울까 싶어 급하게 구운 계란 프라이까지 올리고 나니 저녁상은 제법 소담스러웠다. 쿠로코는 아카시와 따로 나와 산지 몇 년이라 이제 계란 프라이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뭐든지 완벽할 것 같았던 사람은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없었으며 자신은 상대방보다 삶은 계란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나았다. 그 실력은 동거를 하게 된 이후로 일취월장은 아니어도 느릿느릿 성장했고 그 결과물은 딱 먹기 좋게 익은 반숙 후라이였다. 쿠로코가 흐뭇하게 식탁을 내려다본다. 타이밍 좋게 아카시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나.”
“아카시 군한테서는 좋은 냄새 납니다.”
“먹고 싶어?”
하여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쿠로코가 정색했다. 아카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 빨리 씻었네요.”
“응. 찝찝해서.”
“덥긴 했죠.”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파바박 털기 시작했다. 머리칼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튀자 쿠로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재 같아요.”
“이렇게 잘생긴 아재 봤어?”
“농담도 못하겠네요. 밥이나 먹어요.”
“응.”
배가 고팠는지 아카시는 얌전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단정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육수에 동동 떠있는 두부가 담백한 맛과 말캉한 식감을 자랑했다. 알 듯 말 듯 볼록하게 올라온 아카시의 볼에 화색이 돈다.
“맛있어. 나날이 실력이 느네.”
“그런가요?”
“응.”
“많이 먹어요. 더울 때는 많이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니까요.”
“내가 할 소리야.”
원체 양이 적은 쿠로코는 아카시의 절반 정도 되는 양의 밥에도 금방 배불러했다. 오늘도 쿠로코의 그릇에는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아카시가 대답을 하며 그릇에 흘깃 곱지 않은 시선을 준다. 물론 쿠로코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억지로 먹다 탈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조금씩 늘리면 되지.”
“그것보다, 밥 다 먹으면 줄 게 있습니다.”
쿠로코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은근슬쩍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는 의도를 알았지만 아카시는 그냥 따라가 주기로 했다. 억지로 정량보다 많은 밥을 먹었다가 체해 호되게 고생했던 쿠로코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뭔데?”
“다 먹으면 줄게요. 두부 식습니다. 어서 먹어요.”
“응.”
뭘 준다는 걸까. 기대감에 아카시의 젓가락질이 조금씩 빨라졌다. 열심히 씹고 삼키느라 바쁜 아카시를 보며 쿠로코가 보이지 않게 설핏 웃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고맙습니다. 식탁 정리는 제가 할게요.”
“응.”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식사가 끝나고 아카시는 얼른 손에 고무장갑을 끼웠다. 쿠로코가 빨래에 밥까지 했으니 설거지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터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쿠로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나 다 씻고 갈 테니 소파에서 좀 쉬어.”
“괜찮아요. 그릇 몇 개 없잖아요.”
“그래도…….”
쿠로코는 아카시가 설거지를 하는 내내 아카시의 옆에 서있었다. 유치원에서 일하느라 오래 서있는 쿠로코가 다리가 아플까 앉아있으라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쿠로코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오히려 슬금슬금 뒤로 가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아오는 통에 아카시는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일찍 퇴근해주세요.”
“노력할게.”
폭 묻은 얼굴을 부비작거리며 쿠로코가 중얼거린다. 아카시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는 햇빛에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서늘한 에어컨 공기와 달리 따뜻한 아카시의 체온에 쿠로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이게 바로 행복이지.
“다했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설거지를 끝낸 아카시가 고무장갑을 벗고 뒤로 돌아 싱크대에 몸을 기댄다. 품에 안겨있는 애인의 나른한 표정이 참 귀여워서 아카시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쿠로코를 끌어안았다.
“테츠야 살 말랑말랑.”
“은근슬쩍 허리 만지지 마세요.”
“싫어.”
“어휴…….”
“그러는 테츠야도 가만히 있잖아.”
애인이 만져주는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아카시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시선이 입 안에 꿀을 머금은 듯 달콤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쿠로코가 살짝 발돋움을 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다. 깃털같이 포근한 입맞춤이었다. 쿠로코의 허리를 안은 아카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를 넣어 질척한 소리가 나는 농밀한 키스보다도 더 심장 떨리는 접촉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쿠로코였다. 천천히 멀어지는 입술에 아카시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었지만 쿠로코는 단호하게 뒤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아카시도 등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쿠로코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느릿느릿 따라갔다.
“냉장고는 왜?”
“줄 거 있다고 했잖아요.”
쿠로코가 냉장실도 아닌 냉동실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플라스틱 통이었다. 뭔가 보통 얼음틀보다 훨씬 길쭉하게 생겼는데 그 위로 손잡이 같은 게 대여섯 개 꽂혀있는. 처음 보는 물건에 아카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뭐야?”
대답 대신 쿠로코가 플라스틱 통에 물을 붓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카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한다. 이제 쿠로코는 낑낑거리며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해줄게.”
“후……. 부탁합니다.”
쿠로코에게 통을 넘겨받아 한 손으로는 길쭉한 부분을 잡고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아카시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왔다.
“어?”
그건 다름 아닌 주황색의 얼음 덩어리였다. 아니, 아이스크림인가? 얼음틀의 모양 그대로 얼은 덩어리를 보던 아카시가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돌아보는 눈동자에 이건 뭐야?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른스러워도 이럴 때는 순진무구한 사랑스러운 소년 같아 쿠로코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이요.”
“이게?”
“귀엽죠?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만들어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아카시 군도 좋아할 것 같아 급하게 오렌지 주스로나마 만들어뒀습니다.”
“오렌지 주스 얼린 거구나…….”
“보통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아이들한테 재미있고, 시중에 파는 아이스크림보다 몸에 좋은 아이스크림을 먹이기 위해 좀 더 건강한 재료로 만들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카시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런 아카시를 쿠로코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똑똑한 사람이 단순히 오렌지 주스를 얼렸다는 사실에 신기해할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는. 아니, 보통의 가정에서는 이렇게 사소한 먹을거리에도 이걸 먹을 아이들을 생각해 신경을 쓴다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통감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은 살면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을 테니까.
말이 없어진 아카시를 올려다보는 쿠로코의 입이 썼다.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온 길에 파여진 커다란 구멍들을 이렇게 종종 마주하게 된다. 쿠로코는 구멍을 피하기보다는 똑바로 마주하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나마 구덩이를 메꿔주고 싶었다. 아카시의 마음속에 텅 비어있을 부분들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었다.
오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건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가, 쿠로코 테츠야가, 이때까지 당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전부 쏟아 부어 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공허함이 채워지는 날은 있어도 외로워할 날은 없을 미래를, 같이 그려가자고, 그렇게 말하고자 함이었다. 다행히 저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고 제가 어떤 의도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쿠로코의 예상대로, 아카시가 쿠로코를 강하게 끌어안아왔다. 나 이거 처음 먹어보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묻는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저는 아카시 군에 대해 다 알아요. 아카시 군이 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요. 가만히 품에 안겨오며 눈을 감은 쿠로코가 속삭였다. 저를 달래듯 포근한 목소리에 아카시가 쿠로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며 목덜미를 간질이는 붉은 머리칼을 쿠로코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진짜 몸에 좋은 블루베리 요거트로 만들어줄게요. 제가 직접 갈아서요. 오늘은 오렌지 주스로 참아주세요.”
“응.”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요거트든, 주스든. 하다못해 물이었어도 아카시는 기쁜 마음으로 쿠로코의 사랑을 먹어치웠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제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쿠로코의 진득한 애정에 아카시는 괜히 툭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조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작게 베어 물었다.
“맛있네.”
설탕이라도 탄 듯 다디단, 아주 행복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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