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흑] 어떤 애정

단편 2017. 9. 10. 01:09

  * 리퀘박스 요청 - 대학 졸업 후 달달하게 동거하는 사업가 아카시 x 보육교사 쿠로코

 

  으, 더워. 엘리베이터에도 에어컨을 설치해달라고 할까. 그러게 테츠야가 고집 부려도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야했는데. 시원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하면서 탄 엘리베이터의 공기는 바깥과 똑같이 후덥지근했다. 아카시는 몸을 비틀며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와이셔츠의 목깃을 손가락으로 떼어냈다. 곧, 집에 도착한다.

 

  “으아, 시원하다.”

  “다녀오셨어요, 아카시 군.”

  “다녀왔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마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출근하기 전, 더우면 참지 말고 꼭 에어컨 켜고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얌전히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쿠로코가 웃으며 아카시를 맞았다. 쾌적한 온도에 저를 반겨주는 사랑스런 애인.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불쾌함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노란 앞치마를 걸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쿠로코는 아주 귀여웠다. 아카시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저녁 준비 하고 있었어?”

  “네. 에어컨 켰으니까 아카시 군이 좋아하는 탕두부나 먹을까 하고.”

  “헉. 좋아.”

  “씻고 와요. 나는 아까 오자마자 씻었습니다.”

  “응.”

 

  웬일로 조용히 대답하기에 바로 씻으러 가나 싶었는데, 쿠로코의 뺨에 따뜻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꾹 닿았다 떨어졌다.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허리에 상대방의 팔도 감긴 채였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쿠로코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다. 아카시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카시 군!”

  “아니, 뽀뽀를 몇 년 째 하는데 아직 부끄러워해?”

  “아무 생각 없이 있는데 하니까 그렇죠!”

  “그럼 지금 또 해도 돼?”

  “빨리 씻기나 하세요!”

  “네, 네.”

 

  쿠로코의 손에 떠밀려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아카시는 즐거운 기색이었다. 장난기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저한테는 소년같이 구는 아카시였다. 이제 진짜로 씻나 싶었는데 아카시가 아차, 하며 뒤돌았다. 쿠로코가 재빨리 아카시를 쳐다본다.

 

  “이번엔 또 왜요.”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겼어.”

  “아,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고마워.”

 

  서랍 안에는 보송하게 말라 가지런히 개어진 빨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사실 집안일은 두 사람이 돌아가며 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카시의 일은 너무 바빴고 어쩔 수 없이 웬만한 일은 다 쿠로코가 하게 되었다. 아카시는 적절하지 못한 분배에 계속 미안해했지만 쿠로코는 솔직히 정말로 괜찮았다. 제 손으로 빤 - 물론 세탁기가 하지만 어쨌든 자기가 세탁기 안에 넣으니까 - 옷을 입고 출근하는 아카시라든지, 손수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아카시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아카시가 씻으러 들어가고 쿠로코는 저녁 차리기를 마무리했다. 쿠로코도 일을 다니다 보니 늘 집안일에 신경 쓸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카시는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너저분해지지 않게 정리해주시는 아주머니를 부를 수 있었다는 소리다. 결국 상차림의 마무리는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오이소박이 같은 기본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고, 제가 육수를 내 마트에서 사온 두부를 담가 끓인 탕두부를 작은 화로위의 뚝배기에 옮기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 2공기까지 나란히 식탁에 올라간다.

 

  혹시나 아쉬울까 싶어 급하게 구운 계란 프라이까지 올리고 나니 저녁상은 제법 소담스러웠다. 쿠로코는 아카시와 따로 나와 산지 몇 년이라 이제 계란 프라이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뭐든지 완벽할 것 같았던 사람은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없었으며 자신은 상대방보다 삶은 계란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나았다. 그 실력은 동거를 하게 된 이후로 일취월장은 아니어도 느릿느릿 성장했고 그 결과물은 딱 먹기 좋게 익은 반숙 후라이였다. 쿠로코가 흐뭇하게 식탁을 내려다본다. 타이밍 좋게 아카시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나.”

  “아카시 군한테서는 좋은 냄새 납니다.”

  “먹고 싶어?”

 

  하여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쿠로코가 정색했다. 아카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 빨리 씻었네요.”

  “응. 찝찝해서.”

  “덥긴 했죠.”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파바박 털기 시작했다. 머리칼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튀자 쿠로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재 같아요.”

  “이렇게 잘생긴 아재 봤어?”

  “농담도 못하겠네요. 밥이나 먹어요.”

  “응.”

 

  배가 고팠는지 아카시는 얌전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단정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육수에 동동 떠있는 두부가 담백한 맛과 말캉한 식감을 자랑했다. 알 듯 말 듯 볼록하게 올라온 아카시의 볼에 화색이 돈다.

 

  “맛있어. 나날이 실력이 느네.”

  “그런가요?”

  “응.”

  “많이 먹어요. 더울 때는 많이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니까요.”

  “내가 할 소리야.”

 

  원체 양이 적은 쿠로코는 아카시의 절반 정도 되는 양의 밥에도 금방 배불러했다. 오늘도 쿠로코의 그릇에는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아카시가 대답을 하며 그릇에 흘깃 곱지 않은 시선을 준다. 물론 쿠로코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억지로 먹다 탈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조금씩 늘리면 되지.”

  “그것보다, 밥 다 먹으면 줄 게 있습니다.”

 

  쿠로코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은근슬쩍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는 의도를 알았지만 아카시는 그냥 따라가 주기로 했다. 억지로 정량보다 많은 밥을 먹었다가 체해 호되게 고생했던 쿠로코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뭔데?”

  “다 먹으면 줄게요. 두부 식습니다. 어서 먹어요.”

  “응.”

 

  뭘 준다는 걸까. 기대감에 아카시의 젓가락질이 조금씩 빨라졌다. 열심히 씹고 삼키느라 바쁜 아카시를 보며 쿠로코가 보이지 않게 설핏 웃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고맙습니다. 식탁 정리는 제가 할게요.”

  “응.”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식사가 끝나고 아카시는 얼른 손에 고무장갑을 끼웠다. 쿠로코가 빨래에 밥까지 했으니 설거지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터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쿠로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나 다 씻고 갈 테니 소파에서 좀 쉬어.”

  “괜찮아요. 그릇 몇 개 없잖아요.”

  “그래도…….”

 

  쿠로코는 아카시가 설거지를 하는 내내 아카시의 옆에 서있었다. 유치원에서 일하느라 오래 서있는 쿠로코가 다리가 아플까 앉아있으라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쿠로코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오히려 슬금슬금 뒤로 가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아오는 통에 아카시는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일찍 퇴근해주세요.”

  “노력할게.”

 

  폭 묻은 얼굴을 부비작거리며 쿠로코가 중얼거린다. 아카시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는 햇빛에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서늘한 에어컨 공기와 달리 따뜻한 아카시의 체온에 쿠로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이게 바로 행복이지.

 

  “다했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설거지를 끝낸 아카시가 고무장갑을 벗고 뒤로 돌아 싱크대에 몸을 기댄다. 품에 안겨있는 애인의 나른한 표정이 참 귀여워서 아카시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쿠로코를 끌어안았다.

 

  “테츠야 살 말랑말랑.”

  “은근슬쩍 허리 만지지 마세요.”

  “싫어.”

  “어휴…….”

  “그러는 테츠야도 가만히 있잖아.”

 

  애인이 만져주는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아카시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시선이 입 안에 꿀을 머금은 듯 달콤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쿠로코가 살짝 발돋움을 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다. 깃털같이 포근한 입맞춤이었다. 쿠로코의 허리를 안은 아카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를 넣어 질척한 소리가 나는 농밀한 키스보다도 더 심장 떨리는 접촉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쿠로코였다. 천천히 멀어지는 입술에 아카시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었지만 쿠로코는 단호하게 뒤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아카시도 등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쿠로코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느릿느릿 따라갔다.

 

  “냉장고는 왜?”

  “줄 거 있다고 했잖아요.”

 

  쿠로코가 냉장실도 아닌 냉동실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플라스틱 통이었다. 뭔가 보통 얼음틀보다 훨씬 길쭉하게 생겼는데 그 위로 손잡이 같은 게 대여섯 개 꽂혀있는. 처음 보는 물건에 아카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뭐야?”

 

  대답 대신 쿠로코가 플라스틱 통에 물을 붓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카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한다. 이제 쿠로코는 낑낑거리며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해줄게.”

  “후……. 부탁합니다.”

 

  쿠로코에게 통을 넘겨받아 한 손으로는 길쭉한 부분을 잡고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아카시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왔다.

 

  “어?”

 

  그건 다름 아닌 주황색의 얼음 덩어리였다. 아니, 아이스크림인가? 얼음틀의 모양 그대로 얼은 덩어리를 보던 아카시가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돌아보는 눈동자에 이건 뭐야?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른스러워도 이럴 때는 순진무구한 사랑스러운 소년 같아 쿠로코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이요.”

  “이게?”

  “귀엽죠?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만들어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아카시 군도 좋아할 것 같아 급하게 오렌지 주스로나마 만들어뒀습니다.”

  “오렌지 주스 얼린 거구나…….”

  “보통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아이들한테 재미있고, 시중에 파는 아이스크림보다 몸에 좋은 아이스크림을 먹이기 위해 좀 더 건강한 재료로 만들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카시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런 아카시를 쿠로코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똑똑한 사람이 단순히 오렌지 주스를 얼렸다는 사실에 신기해할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는. 아니, 보통의 가정에서는 이렇게 사소한 먹을거리에도 이걸 먹을 아이들을 생각해 신경을 쓴다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통감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은 살면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을 테니까.

 

  말이 없어진 아카시를 올려다보는 쿠로코의 입이 썼다.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온 길에 파여진 커다란 구멍들을 이렇게 종종 마주하게 된다. 쿠로코는 구멍을 피하기보다는 똑바로 마주하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나마 구덩이를 메꿔주고 싶었다. 아카시의 마음속에 텅 비어있을 부분들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었다.

 

  오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건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가, 쿠로코 테츠야가, 이때까지 당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전부 쏟아 부어 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공허함이 채워지는 날은 있어도 외로워할 날은 없을 미래를, 같이 그려가자고, 그렇게 말하고자 함이었다. 다행히 저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고 제가 어떤 의도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쿠로코의 예상대로, 아카시가 쿠로코를 강하게 끌어안아왔다. 나 이거 처음 먹어보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묻는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저는 아카시 군에 대해 다 알아요. 아카시 군이 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요. 가만히 품에 안겨오며 눈을 감은 쿠로코가 속삭였다. 저를 달래듯 포근한 목소리에 아카시가 쿠로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며 목덜미를 간질이는 붉은 머리칼을 쿠로코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진짜 몸에 좋은 블루베리 요거트로 만들어줄게요. 제가 직접 갈아서요. 오늘은 오렌지 주스로 참아주세요.”

  “응.”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요거트든, 주스든. 하다못해 물이었어도 아카시는 기쁜 마음으로 쿠로코의 사랑을 먹어치웠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제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쿠로코의 진득한 애정에 아카시는 괜히 툭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조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작게 베어 물었다.

 

  “맛있네.”

 

  설탕이라도 탄 듯 다디단, 아주 행복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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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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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gm : 종현 - Lonely (Feat. 태연)

   * 그냥... 연애에 서툰 적흑이 보고 싶었어요. (  mm)*



  사랑한다는 말은 진부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 가사에서, 드라마에서. 좀 더 보태면 길거리에서조차 사람들이 흔하게 뱉는 말이라고. 남들이 사용하는 가벼운 말로 표현하기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아카시로써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날이 더해지는 마음의 무게는 익숙하지 않아 가둬두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혹시나 입 밖으로 내었다 소중한 마음이 넘쳐흘러 사라져버릴까, 아카시는 어느 순간부턴가 사랑을 입에 담지 않게 됐다. 다만 소복소복 쌓인 감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새어나올 때면 조심히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곤 했다. 그럼 부글거리던 탄산이 얌전해지듯 격정도 가라앉았다.


  습관이 된 행동에 가슴이 잠잠해지면 코르크 마개를 씌운 듯 제 안을 꽉 채우는 마음에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꾹꾹 눌러오고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알맞은 표현을 찾게 되면 곱게, 소중하게 키워온 마음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슬프진 않았다. 마음 속 유리병에 찬란히 담겨있을, 어쨌든 사랑인 그것을 꺼낼 날이 언젠간 올 테니까. 완벽해야 할 그 날을 위해 아카시는 더 마음을 고르고 다듬었다.

 

  이렇게 후회할 날이 올 줄은 모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맞은편의 사람이 입술을 앙 다물고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있다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워 손을 뻗었지만 눈물의 주인은 그마저도 쳐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다시 손을 내밀 생각은 못하고 아카시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는 아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 그러니까 쿠로코는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아냈다. 얇고 부드러운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에 젖은 자국이 생긴 게 무색하게 다시 눈물방울이 솟아난다. 울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처량했다.

 

  하늘색 머리칼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달리 찬란하게 빛이 났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 두 사람은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잡았고 쿠로코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카시를 불렀다. 평소와 달랐던 점은 왜? 하고 대답하며 마주한 얼굴이 어딘가 비장해보였다는 점이다.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응.”

  “아카시 군. 절 사랑하나요?”

  “쿠로코. 그건 전부터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

 

  쿠로코는 부쩍 사랑한다는 말을 졸랐다. 솔직히 말해, 아카시는 빈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마음에 비해 초라하고, 흔해빠졌고,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알았다면 얼마든지 귓가가 닳도록 속삭여줬겠지만 불행히 아카시는 훨씬 더 그럴듯한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이때까지 이런저런 말로 회피만 하던 아카시는 결국 쿠로코에게 솔직히 제 생각을 털어놓았더랬다. 빙빙 돌린 긴 설명에 처음에는 이해해주던 쿠로코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아카시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얼굴엔 점점 서운한 기색이 드리웠다.

 

  시무룩하게 쳐진 보고 있으면 쿠로코가 원하는데 뭔들 못해주랴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곤란한 날들이 늘어갔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려니 싶었다. 대답 없는 아카시에 잡고 있던 손을 휙 뺀 쿠로코만 아니었다면.

 

  “쿠로코……?”

  “됐습니다.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손은 왜 빼?”

  “잡기 싫어져서요.”

  “쿠로코.”

 

  잡기 싫다는 말에 불현 듯 불안감이 차오른 아카시가 뭐라도 말하려 쿠로코를 불렀지만 쿠로코는 냉랭했다. 저를 마주보지 않고 애꿎은 땅바닥만 노려보는 쿠로코의 눈이, 자신을 보기 싫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카시가 다급하게 다시 작은 손을 찾았다.

 

  그러나 뜨겁게 손등을 감싸는 아카시의 손과 달리 쿠로코는 손을 마주 잡지 않고 가볍게 주먹만 쥐었을 뿐이다.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정신이 아득해진 아카시가 얼른 허리를 낮춰 숙여진 쿠로코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마주했다. 쿠로코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쿠로코.”

  “…….”

  “쿠로코!”

 

  이러다 울겠다 싶어 아카시는 이제 쿠로코의 양팔을 붙잡았다. 힘 조절이 안 된 손이 팔뚝을 꽉 그러쥐었다. 그 악력에 반응이 없던 쿠로코가 아카시를 마주봐왔다. 불안해 흔들리는 눈동자에 울상이 된 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반응 하나에도 이렇게 애타하면서, 도대체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거야? 속상한 마음이 북받친 쿠로코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카시 군.”

  “응.”

  “저 불안해요.”

  “…… 뭐?”

  “불안하다고요.”

 

  참다 참다 진심을 내뱉는 목소리가 울음이 섞여 엉망이었다. 말로 하고 보니 지치고 외로운 마음이 더 사무치게 느껴졌다. 울면서 말하고 싶지 않은데, 떼쓰는 어린 아이처럼 입술이 멋대로 씰룩였다. 결국 시선을 떨군 쿠로코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급해진 아카시가 일그러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쿠로코를 바라본다.

 

  “왜, 말을, 흐, 안 해줍니까…….”

  “…… 천천히 얘기해도 돼.”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아카시에 쿠로코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쿠로코의 어깨가 달싹인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게 될 것 같아 쿠로코는 딸꾹질을 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처음엔, 괜찮다고, 끅, 생각했어요.”

  “…….”

  “아카시 군이, 말을 안 해줘도, 흐, 믿었으니까.”

  “쿠로코…….”

  “그치만……, 흡.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카시 군은 응, 하고 말았잖아요.”

 

  여간 서러운 게 아니었던지 쿠로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흐느끼다 못해 꺽꺽거리면서도 쿠로코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울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듦에도 아카시는 쿠로코가 말을 마칠 때까지 쿠로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쿠로코가 힘들게 전한 본심은 이랬다. 응, 하고 짧게 대답해주고는 저는 어떤지 얘기 해주지 않는 아카시가 서운했다고. 그냥 빈말이어도 나도 사랑한다고만 속삭여줘도 좋았을 것 같다고. 아카시가 저를 많이 좋아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거랑 별개로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시의 마음을 이해하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지다 이 상황에 지쳐버렸다고.

 

  울다 못해 기침까지 하는 쿠로코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입이 썼다. 설마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항상 잘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쿠로코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자신보다 더 강하고 어른스러울 때도 있는 연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그냥 콱 죽고 싶어졌다. 무슨 고집을 피운다고 쿠로코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걸까.

 

  더 화가 나는 건 이 상황에서도 솔직하게 제 마음을 말할 수가 없는 자신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쿠로코의 등을 토닥여주던 아카시의 팔이 돌연 쿠로코를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일단 도망가지 못하게 품에 두고 있어야 진정을 할 것 같다. 불안함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갑자기 아카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쿠로코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눈을 깜박였다. 젖은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아카시 군……?”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고.”

  “으응.”

 

  아카시는 답지 않게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느라 애꿎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을 고르고 있는 표정을 올려다보며 쿠로코는 아카시의 가슴팍에 살며시 뺨을 기댔다. 쿵, 쿵. 정상보다 조금 빨리, 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박동이 아카시가 많이 놀랐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기분이었다. 굳건한 사람이 제 한 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구나. 쿠로코는 새삼스레 저를 향한 아카시의 마음을 다시 느꼈다.

 

  쿠로코가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카시는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해 초조한지 발끝을 탁탁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쿠로코를 끌어안은 팔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이 꽉 들어가 있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쿠로코의 입가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 아카시는 이런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 몸짓 하나에 저를 사랑하고 있음이 묻어나오는.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매일 느끼고 있었는데. 괜히 들려주지 않는 그 말 한 마디에 서운함이 들어 투정을 부렸다. 익숙해지면 모른다더니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아카시는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좀 부끄러워진 쿠로코가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카시의 몸이 움찔거린다.

 

  “쿠로코?”

  “있잖아요.”

  “응.”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불안함과 걱정스러움이 가득하다. 다른 거 하나 없이 오롯이 저만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던 쿠로코가 발꿈치를 들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가볍고 간질간질하게 맞닿은 체온에 아카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쿠로코가 씩 웃었다.

 

  “뭐야……?”

  “앞으로 너무 마음이 벅찰 땐 입 맞추기로 해요.”

  “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다투는 시간은 아까우니 그 사이에 뽀뽀라도 합시다.”

 

  모든 걸 다 털어낸 쿠로코는 후련한 목소리였다. 쿠로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잠깐 얼이 빠져있던 아카시는 당당한 쿠로코의 표정에 웃기 시작했다.

 

  “좋은 방법이네. 나한테는 표현할 말을 안 찾는 게 더 이득 아니야?”

  “그건 아니고요. 찾을 때까지 이걸로 내가 참아주겠다는 말입니다.”

  “괜찮겠어? 뽀뽀에 정신 팔리느라 늦어져도?”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래요.”

  “그래, 그럼.”

 

  또랑또랑하게 제 주장을 말할 때는 언제고 얘기가 끝나자 민망해졌는지 쿠로코가 품에 얼굴을 숨겼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가 조금 붉었다. 아, 사랑스러워라.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크게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웃던 아카시는 그냥 참지 않고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적나라한 소리에 분홍빛이던 피부가 확 붉게 변했다. 분명 얼굴도 예쁘게 물들었으리라. 아카시가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어 양손으로 느릿하게 쿠로코의 뺨을 감싸 얼굴을 들어올렸다.

 

  아, 역시.

 

  아카시의 눈에 들어온 건 제가 한 짓을 깨닫고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랑스런 연인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모양새에 입맛을 다신 아카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더니 두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저항 없이 작게 열린 입술 안으로 아카시의 혀가 들어가 숨어있는 작은 혀를 부드럽게 얽어낸다.

 

  정신없이 여린 입안을 가득 헤집던 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자 아쉬운 듯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의 작은 입술을 머금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사탕을 먹듯 연신 입술을 물고 빨던 아카시의 입술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떨어졌다. 호흡을 나눈 두 사람의 숨이 거칠었다. 쿠로코는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런 쿠로코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아카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쿠로코의 손 위에 다시 쪽, 쪽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로코가 후련한 것처럼 아카시는 아카시대로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라도 표현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제 애정을 올곧이 받으며 수줍어하는 애인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선물해준 것은 보습이 잘 되는 립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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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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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발걸음

단편 2017. 6. 30. 00:41

  * 리퀘박스 요청 - 아이돌 AU


  [잠깐 작업실로 와.]

  [저 벌써 숙소 도착ㅎ]


  화면을 꾹꾹 누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쿠로코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끝맺기보다 그냥 휴대폰을 잠그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 불만을 내비쳐봤자 어차피 녹음실로 가게 될 자신이었다. 한숨을 폭 내쉰 쿠로코가 방금 침대에 던져뒀던 후드 집업을 집어 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은편 침대에서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던 아오미네가 한 쪽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어디 가?


  “작업실요.”

  “또 아카시냐?”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 대신 살풋 웃은 쿠로코가 소매에 팔을 꿴다. 다녀올게요. 아오미네가 손을 휘적거렸다. 인사를 뒤로한 채 쿠로코는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키세랑 미도리마는 방에서 자는 듯했고 무라사키바라만 부엌에서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쿠로칭, 어디 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응. 너무 늦게 오지는 말구.”

  “네.”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쿠로코가 현관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얼굴과 목덜미에 끼쳐들었다. 진짜, 녹음실이 가까워서 망정이지 아니면 그냥 안 갔을 겁니다. 속으로 투덜거린 쿠로코가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물기를 대충 손등으로 훔쳐내며 쿠로코는 생각했다. 왜, 항상, 리더는 이 밤중에 자기만 부르는지. 그리고 자기는 왜, 불릴 때마다 얌전히 향하는지.


  “왔어?”


  녹음실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생수병과 종이, 연필 나부랭이들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엎드린 아카시였다. 몸에 힘이 쭉 빠진 채 늘어져있는 모습에 쿠로코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아카시한테 다가간다. 딱 봐도 기운 없어 보이는 아카시가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을 내민다. 쿠로코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맡기자 약간은 마른 듯한 팔이 제 허리를 감싸왔다.

  아카시는 곡 작업을 할 때면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졌다. 보컬 레슨을 받을 때나 춤 연습을 할 때는 늘 가뿐하게 해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노래를 만들 때면 피부도 푸석해지고 엉망으로 마르곤 했다. 선천적으로 감성적인 사람이어서 안에 쌓인 건 많은데 쏟아내는 방법을 몰라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완성되는 곡은 매번 최고치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곤 해서, 팀원들은 아카시에게 곡 작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지만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이 쓰긴 썼다. 어느 새 배 부근에 얼굴을 푹 묻은 아카시의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쿠로코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잠은 좀 잤습니까?”

  “한 시간 정도.”

  “밥은요?”

  “… 아직.”


  이 사람이 정말. 훅, 하고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천장 한 번 쳐다보는 걸로 열을 식힌 쿠로코가 언제부터 굶었냐고 물었다.


  “어제…, 저녁인가?”

  “저기요.”


  겨우 식힌 화가 다시 스멀스멀 차오른다. 몸에 힘이 들어가 배가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는지 힘없이 피식 웃은 아카시가 웅얼거린다.


  “화내지마, 나 힘들어.”

  “화 안 나게 생겼습니까? 이러다 저번처럼 또 쓰러지려고 그러죠.”

  “안 그러려고 너 불렀잖아.”

  “제가 뭐 해주는 것도 없잖아요. 먹을 거 사오라고 시키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나 쉬게 만들어주는데?”

  “이렇게 쉬지 말고 차라리 숙소에 와서 좀 자고 가요.”

  “싫어. 조금만 더 있으면 멜로디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하여튼 고집은. 쿠로코는 아카시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똥고집인지라 아카시가 허리께의 옷을 부여잡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미안해. 뭐가요. 밤에 자꾸 불러내서. ….


  “쿠로코?”

  “불러내는 건 상관없는데요.”

  “밥 좀 챙겨먹고 잠도 좀 자고 하세요.”

  “테츠야도 바닐라 쉐이크로 때울 때도 많잖아.”

  “너는 그것도 안 먹잖아요.”

  “그건 그래.”


  아카시는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오선지로 시선을 옮겼다. 몇 마디 그려지기도 전에 좍좍 그어진 엑스표시가 화려했다. 쿠로코가 오선지를 만지작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아직 많이 모자라 보이는데 기한 안에 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다고. 다 만들 수 있어.”


  귀신같이 속마음을 알아챈 아카시가 품에서 고개를 떼어 시선을 마주해왔다. 얼굴은 까칠해도 눈에서는 열의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는 죽어나가더니 이제야 정말 감을 잡았나보다. 가만히 의지를 받아내던 쿠로코가 살며시 웃었다.


  “아카시 군 완벽주의는 말해봐야 입 아프죠.”

  “당연하지. 완벽하지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을 거야.”

  “그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네.”


  그럼 테츠야 연습량 더 늘려도 불만 없겠네. 말하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굳은 표정의 쿠로코한테서는 장난이라곤 1mg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카시 군. 저 지금도 연습 끝나면 화장실 달려가는 거 알잖아요. 그것만은… 하하. 농담이야.

  그럼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지지 않았지만 아카시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쿠로코한테서 완전히 몸을 뗐다.


  “숙소에 가서 잘 거야?”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저기 소파 베드에서 자고 있으면 안 돼? 몇 시간 안에 끝날 것 같은데.”

  “상관은 없는데 진짜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습니까?”

  “응. 네가 있으니까.”

  “…?”


  무슨 소리죠. 쿠로코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갸우뚱하는 모습이 귀여워 아카시가 웃으며 쿠로코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을 헝클었다.


  “넌 내 뮤즈잖아.”

  “엑.”


  쿠로코가 정색을 하며 능글능글한 얼굴의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진짠데.”

  “농담은 적당히 해주세요. 저 없어도 잘만 곡 만들면서.”

  “나 항상 곡 작업할 때는 너 불렀는데?”

  “… 으음.”


  사실인지라 부정하기 어려웠다. 부끄러워진 쿠로코가 휙 뒤돌아 소파베드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끝이 붉었다. 뒤에서 아카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 믿어주는 거야? 서운한데. 쿠로코는 대꾸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아카시를 등지고 누웠다.


  “저 여기서 자고 있을 테니까 작업 마저 하세요.”

  “응.”


  아카시도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웃음을 머금은 채 의자를 빙글 돌려 바로 앉아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펜에서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쿠로코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다시 몸을 돌려 아카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종종 피아노로 음을 확인하는지 어느 샌가 헤드폰을 쓴 모습이었다.

  커다란 헤드폰 아래로 보이는 머리가 유독 작아보였고, 마른 어깨가 유독 수척하게 느껴졌다. 힘들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저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얹혀있는지 알았다. 아카시가 지칠 때 이런 식으로라도 위로가 된다면, 자신은 그게 언제가 됐든 아카시를 만나러 올 것이다. 아카시도 그걸 알아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자신은 아카시의 뮤즈가 맞을지도 몰랐다.

  생각하는 동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쿠로코가 속삭였다. 파이팅. 아카시 군.


  잠결에 무언가 몸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뒤척이기가 영 갑갑해 미간을 찌푸리던 쿠로코가 가늘게 눈을 떴다. 창문 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여기… 작업실?’


  뜨이지 않는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의 팔이 쿠로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좀 더 자자…. 아직 새벽 다섯 시야….”

  “아카시 군…?”

  “응….”


  잠든 지 얼마 안 됐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아카시가 잠에 빠진 채 웅얼웅얼 대답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눈만 껌뻑껌뻑하던 쿠로코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기 전까지 널브러져 있던 오선지가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작업 다 했구나….’


  정말로 몇 시간 안에 작업을 끝냈다. 아카시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한껏 내려온 다크서클 마저 기특해 쿠로코가 부드럽게 눈 밑을 쓸었다. 아카시가 손에 얼굴을 비벼왔다. 나른한 고양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샌다.


  “자자니까 테츠야…. 자자. 코코 낸내.”


  품 안에서 움직이는 쿠로코가 거슬렸는지 아카시가 눈을 감은 채 쿠로코가 다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로 꽁꽁 고쳐 안았다. 따끈따끈한 체온과 포근한 체향이 훅 끼쳤다. 그러고 보니 아카시가 곡 작업을 다 끝난 아침은 항상 이랬다. 쿠로코는 아카시가 부를 때마다 오는 이유를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 순간을 또 맛보기 위해서, 자신은 그 밤중에 아카시를 만나러 걸음을 했나보다. 아카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쿠로코는 따뜻해져오는 마음 한 구석을 느끼며 자세를 편하게 잡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밝아져오는 햇살이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비쳐왔다.

  이 둘의 단잠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쿠로코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며 울부짖던 키세와 아오미네 때문에 다 깨졌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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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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