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로코와 아카시 둘 다 엄청난 캐붕입니다. (아카시가 여전히 쿠로코를 테츠야로 부릅니다. 왜냐면 제가 좋아해서.)
* 라스트 게임 스포 및 라스트 게임을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적흑이지만 아카시의 등장이 매우 적습니다. 아카시 사랑해 (...)
* 그냥… 제가 좋아서 쓴 글이에요… 창피합니다… ( mm)
얼마만이냐, 우리. 카가미는 주황색 포장지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이제 막 오랜만에 만난 마지바의 치즈버거와 해후를 시작한 참이었다. 종이를 벗겨내고 뽀얀 빵을 빛내고 있는 버거를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앞에서 진득한 시선 - 지금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그 버거가 넘어갑니까? - 이 느껴졌다. 정확히 13개의 버거 값을 지불한 사람, 쿠로코 테츠야가 바로 그 시선의 주인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민 상담 해주기로 했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걸 느끼며 카가미가 살그머니 버거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놈의 고민상담은 어째 일본 들어올 때마다 하냐! 카가미는 처음으로 쿠로코의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들어준 날을 떠올렸다.
* * *
“여, 카가미! 일본에 온 걸 축하해!”
“이게 축하할 일이냐! 카가미,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예요!”
“그 말버릇도 여전하네~”
조용했던 공항이 카가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미국으로 전학 갔다 오랜만에 일본을 방문한 카가미를 반겨주기 위해 모인 세이린이 원인이었다. 몇 달 만에 만나는 건데도 여전한 모습에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던 카가미가 순간 드는 허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라, 그런데 쿠로코는… 요?”
“저는 여기 있습니다.”
“으악!”
“뭐야, 카가미~ 오랜만에 만나서 다시 쿠로코 눈치 못 채는 상태로 돌아왔냐?”
“아니거든!”
“맞는 것 같은데요.”
서운합니다, 카가미 군. 갈 때 그렇게나 눈물겨운 인사를 했는데. 쿠로코가 웅얼거리자 안 그래도 출국할 때 만들었던 흑역사가 민망해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쾅 박아 승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카가미가 다시금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만 소리 지르세요.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너…! 익!”
다시 한 번 시선을 받는 건 싫은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힌 카가미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 쿠로코가 느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웃긴 웃었는데… 오랜만에 웃는 사람 마냥 입이 일그러지는 모양새가 어색해 카가미가 금방 진지한 얼굴을 해왔다.
“쿠로코. 무슨 일 있어?”
“….”
평소였으면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할 텐데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침묵만 지키는 쿠로코가 이상했다. 선배들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들도 모른다는 듯 어깨만 들썩였다. 흠…. 잠깐 고민하던 카가미는 따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쿠로코의 손목을 잡아채 공항을 빠져나왔다.
“카가미 군!”
“쿠로코! 우리 오랜만에 마지바나 가자고!”
손을 끌어당기는 무지막지한 힘에 쿠로코는 못 이기는 척 카가미의 뒤를 따랐다. 마지바에 들어서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햄버거 냄새가 풍겨왔다. 여전히 식성은 좋은지 카가미는 메뉴판을 읽듯 줄줄 버거를 주문했고, 쿠로코는 바닐라 셰이크 스몰 사이즈를 부탁했다. 쿠로코는 버거 안 먹어? 입맛이 없습니다. 흐응.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잖아.”
“그렇네요.”
이 대화를 끝으로 카가미는 산더미처럼 쌓인 버거를 들고 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포장지를 벗겨 곧장 버거를 입에 넣는 동안에도, 어느새 쟁반에 구겨진 포장지만 남았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쿠로코의 바닐라 셰이크 컵에서 빈 소리가 나고 나서야 턱을 괸 채 밖을 바라보고 있던 카가미가 쿠로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불러?”
“네.”
“진짜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셰이크만으로 배가 차는 거지?”
“이때까지 봐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항상 신기하니까 그렇지.”
“… 사람 끌어와 놓고, 실없는 소리만 하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잠깐잠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쿠로코는 가차 없었다. 당황한 카가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쿠로코를 말렸다. 잠깐, 앉아봐! …?
“너 밥도 못 먹은 얼굴 하고 있기에 데려왔어. 안 그래도 말랐는데 피골이 상접할 것 같아서.”
“그런 어려운 말도 압니까?”
“야!"
“농담입니다.”
장난으로 얼버무렸지만 쿠로코는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가미의 상냥함에 지쳤던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다짜고짜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씀씀이도 고마웠다. 봐준다는 표정을 하며 자리에 앉은 쿠로코는 빈 바닐라 셰이크 컵을 만지작거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은….”
“….”
“아카시 군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을 얘기하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어? 아니…, 일, 일단 마저 얘기해봐.”
쿠로코가 얘기한 내용은 이랬다. 재버워크 와의 경기 이후로 또 다른 자신이 사라져 외로워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아카시한테 매일 밤 연락이 온다는 둥, 잊을 만하면 도쿄로 와 다른 사람들은 안 만나고 자기만 만나고 간다는 둥. 게다가 더우니 몸조심하라며 이것저것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고. 그 과정에서 보이는 배려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곰살궂어 어느 아이돌의 노래 가사처럼 심쿵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것이다.
“오늘 들고 온 이 미니 선풍기도 아카시 군이 보내준 겁니다.”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하늘색 미니 선풍기를 쿠로코가 들어보였다. 위에 토끼 귀가 달린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아카시 취향이 저런 거였나…. 카가미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문제는… 아카시 군이 너무 잘생겼다는 겁니다.”
“풋-!!!”
카가미는 쿠로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에 있던 콜라를 시원하게 뿜어버렸다. 쿠로코가 더럽다며 질색을 했다.
“미, 미안.”
“괜찮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해주세요.”
쿠로코는 대충 물티슈로 콜라를 닦아낸 뒤 얘기를 이어갔다. 밤마다 전화통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섹시한지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지를 않나, 도쿄에 올 때마다 나날이 멋있어지고 있어서 시선을 둘 곳을 모르겠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생길 수 있습니까? 또 다정하기는 어찌나 다정한지, 만날 때마다 신데렐라가 된 기분입니다. 카가미 군 신데렐라 알지요? 공주님이요. 아카시 군은 왕자님 같습니다. 진짜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는지 심장이 떨리다 못해 터질 지경입니다. 듣고 있습니까?
“…카가미 군?”
“듣고 있어.”
“반응 좀 해주세요.”
“어….”
대충 카가미가 듣고 있음을 확인한 쿠로코는 카가미의 반응이 어떻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머리를 까도 잘생겼고 내려도 조각 같습니다. 머릿결은 또 얼마나 찰랑거리는데요. 비싼 옷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옷도 찰떡같이 잘 어울립니다. 이거 제가 반한 거겠지요? 친구한테 이런 감정을 갖게 되다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흥분한 듯 종알종알 말을 이어가던 쿠로코는 이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카시 군은 친구를 만나는데도 그렇게 멋지게 입고 오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쉽게 반해버리는 편일까요….”
“음….”
“아카시 군은 모두한테 그렇게 다정한가요?”
이제는 누구한테 묻는 질문일지도 모를 중얼거림을 내뱉은 쿠로코는 애꿎은 빈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세상의 모든 심란함이란 심란함은 다 끌어 모은 얼굴을 하고 있는 쿠로코였지만 사실 그런 쿠로코를 보고 있는 카가미의 솔직한 대답은 NO, 였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아카시 자식,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키세만큼 인기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아카시를 따르는 팬들의 머릿수를 보면 일단 잘생긴 편이 맞았다. 다만 쿠로코가 그 외모를 알아봤다는 게 좀 의외였던 거지. 그리고 일단 아카시는 친구, 그러니까 쿠로코를 단순히 만나러 잊을만하면 도쿄로 올 사람이 아니다. 옷차림이야 어딜 가서든 우아하게 차려입을 놈이지만 쿠로코를 만나러 왔으니 오죽 신경 썼으랴.
약간 의아한 건 쿠로코의 말을 들어봤을 때 대놓고 구애를 하지는 않고 천천히 접근한 듯 한데 생각보다 빨리 쿠로코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까놓고 말해 아카시가 쿠로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키세키 중에는 없었다. 당사자만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모두가 쿠로코를 좇는 진득한 시선을 느낀 터였다. 그렇게 둔한 쿠로코였는데 갑자기 어째서…? 차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가미가 물었다.
“아카시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야?”
“카가미 군, 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요.”
“아.”
“뭐… 먼저 대답하자면. 아카시 군이 잘생겼는데 다정하기까지 해서요.”
“으응.”
“말했잖아요. 신데렐라 된 기분이라고요.”
“….”
“사람이 그렇게 잘 챙겨주고 세심하고 다정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멘탈 잡으려고 앞을 똑바로 보면 그 잘생긴 얼굴이 저만 보고 있어요. 안 좋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응. 이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카가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쿠로코를 찾아 롯폰기로 뛰어갈 때 아카시가 “테츠야가 너무 예뻐서 내쉬가 반하면 곤란하니까.” 하고 말하던 게 생각이 났다. 카가미는 끼리끼리 만난다는 옛말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렇구나…, 날아간 영혼이 한 대답은 기운이 없었다. 반면 쿠로코의 눈은 빛이 나다 못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자, 이제 대답해주세요. 카가미 군.”
“…뭘?”
“아카시 군은 원래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행동하나요? 저 말고도?”
어느새 일어나 몸을 카가미 앞까지 쭉 빼고 묻는 쿠로코의 표정은 기대감 반, 아니라고 했을 때의 실망감 반으로 우는 듯 웃는 듯 모호한 표정이었다. 이 일로 이렇게까지 절박한 쿠로코가 안타깝…기도 하고 여러 의미로 보기 힘들었던 카가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너 걔가 나한테 가위 들이밀었던 날을 벌써 잊었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참기로 했다. 쿠로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한테는 안 그래. 다른 애들한테도.”
“정말입니까?”
으음… 카가미는 5초 동안 전부 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대답이 없자 쿠로코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가미 군?”
“까놓고 말해서 아카시도 너 좋아해.”
“…?”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걸까….”
뭐, 이미 말한 걸 어떡하겠어. 대충 그렇게 합리화 해버리는 카가미였다. 한편 쿠로코는 의외의 사실에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자기 자리에 앉은 쿠로코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아카시 군이… 절… 조, 좋아한다고요…? 응. 진짜…? 어. 다른 애들도 다 알아. 키세라든지, 아오미네라든지. 세이린 선배들도 …? 아마.
쿠로코는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얼굴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파랗게 되었다, 붉어졌다 다시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카가미는 얌전히 쿠로코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쿠로코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쿠, 쿠로코?”
그 박력에 깜짝 놀란 카가미가 말리기도 전 쿠로코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마지바 밖으로 뛰어나갔다. 카가미에게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금방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니 아마 아카시한테 하는 모양이었다. 짝사랑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전화를 하다니. 아카시가 저런 남자다움에 반해버렸나, 하고 생각하던 카가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쿠로코.
* * *
그 이후로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원래의 색을 찾은 쿠로코의 얼굴로 봐서는 좋은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란히 카가미를 찾아온 두 사람은 덥지도 않은지 자석마냥 찰싹 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쿠로코가 불러서 나왔는데도 조카 커플의 데이트에 끼어 방해하는 삼촌의 기분을 느끼며 카가미가 조심스럽게 부른 이유를 물었다.
“아, 테츠야한테 듣자니 네가 우리 둘 사이를 이어준 장본인이라고 해서 감사인사도 할 겸 보자고 했어.”
“어어.”
“그런데…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했다며?”
아카시는 웃고 있었지만 아카시의 뒤로 날이 빛나는 가위가 보이는 듯해 카가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끄덕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이내 아카시가 뭐, 덕분에 테츠야의 귀여운 고백을 선물로 받긴 했지만. 하며 동공을 조이던 힘을 풀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 상태로 고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쿠로코는 뭐라고 그랬던가. 부끄러워요, 아카시 군. 하며 아카시의 품으로 파… 파고들었으며, 아카시는 이런 이런,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워. 우리 예쁜이. 따위의 말을 하고는 쿠로코를 끌어안았었지. 아, 내가 이걸 왜 상상하고 있는 거냐. 카가미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던 자신을 한 대 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여튼, 그래. 둘은 그렇게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했고 자신은 더 이상 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분명 그랬다. 그랬는데…
“들어보세요, 카가미 군. 아카시 군이…”
쿠로코는 카가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번의 고민 상담을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종종 스카이프로 사소한 하소연처럼 들리는 자랑을 들어줘서인지 쿠로코는 아예 카가미를 연애상담 - 을 빙자한 염장질 - 상대로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그게 자신을 편하게 고민도 나눌 만큼 친하고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증거라 고맙고 기뻤다.
하지만 연애는 커녕 농구만 알고 해온 카가미에게 누구도 아닌 쿠로코의 입에서 나오는 둘만의 연애사가 너무 스윗해서, 카가미는 대체 뭐라고 답을 해줘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뭐, 이번에도 여느 때와 같이 가벼운 이야기겠지 싶어 마음을 편하게 먹은 카가미가 대충 쿠로코의 말을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아카시 군이랑 더 못 만나겠습니다!”
그래그래. 아카시가 좋ㄷㅏㄱ…
“뭐?!”
“아카시 군이랑 더 못 만나겠다고요.”
카가미 군 제 말 안 듣고 있었죠? 성질을 내며 마시고 있던 바닐라 셰이크를 쿵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는 쿠로코에 카가미가 어물어물 대답했다.
“어, 너무 충격적이라 앞 얘기를 다 까먹었어. 그러니까… 왜, 왜 못 만나겠다고?”
“아카시 군이 너무 저를 배려하기만 합니다!”
“뭐?”
“카가미 군. 아까부터 제 얘기 너무 안 듣는 거 아닙니까?”
“네가 놀랄만한 얘기만 하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금방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쿠로코를 보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 언제는 그 상냥함이 좋다더니 갑자기 왜 이래? 그것보다…
“너 그거 아카시한테는 아직 얘기 안 했지?”
“벌써 했는데요.”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럽니까!”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기분에 쿠로코도 미간을 찌푸리며 카가미를 쳐다보았다. 카가미는 이 충격적인 소식에 매우 놀라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쿠로코를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충격적입니까?”
“어! 매우! 너 아카시가 잘해줘서 좋다며! 공주님 된 기분이라며! 프린세스!”
“그 때는 그랬죠!”
“하?”
“지금은 아닙니다.”
불퉁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뭔가 일이 있었긴 있었나보다. 카가미가 얼른 이유를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아까 계속 말하고 있었다며 짜증을 낸 쿠로코가 이번엔 잘 들으라며 투덜거렸다.
“솔직히… 저랑 아카시 군 사귄지 이제 100일이 넘어갑니다. 아직 방학은 하지 않았으니 계속 주말에만 만났어요. 아카시 군을 자주 만나기가 힘들다는 소립니다.”
“그건 그렇지.”
“저도 남자고 아카시 군도 남자인데 애인과 오랜만에 만나서 금방 헤어져야 할 때 아쉬운 거도 당연하잖아요.”
“으응.”
“그런데 아카시 군은! 보내주기 싫다, 하고 얼굴에 떡하니 쓰여 있는데도 ‘내일 학교 가야하니 이만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어, 테츠야.’ 같은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저녁 6시에 쌩하게 가버린단 말입니다!”
“오, 방금 아카시랑 좀 비슷했어.”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노려보는,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은 쿠로코에 카가미가 깨갱하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연인끼리는 닮는다더니 화를 내는 그 서늘함이 꼭 닮아있었다. 카가미가 다시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자 심호흡으로 진정한 쿠로코가 말을 이었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6시가 뭡니까? 네? 저는 솔직히 학교 지각해도 되니 아카시 군이랑 오래 있고 싶습니다. 아카시 군이 학교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제가 교토로 가도 됩니다. 근데 그것마저도 아카시 군은 ‘네가 피곤하니까… 고생하지 마, 테츠야. 내가 그거 다 할게.’ 라면서 거절합니다.”
으와아… 엄청 닭살. 카가미는 조심스레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코는 말하면서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았습니다. 다정하고, 내 몸 상태도 다 알아주고, 챙겨주고 예뻐해 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게 힘듭니다!”
“아니, 대체 뭐가?”
“저도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2차 성징 제대로 있는! 혈기 왕성한 남자라고요!”
“하아아?”
“아카시 군은 이걸 모르는 걸까요? 모르는 척 하는 걸까요? 솔직히 말해서 아카시 군도 가고 싶어 하는 기색 하나도 없으면서 저 배려한다고 일찍 가는 거 하나도 이해 안 갑니다! 아카시 군이 가지 말고 우리 좀 더 놀면 안 될까? 이 한마디만 해주면 저 집에 안 갈 수 있습니다. 요즘 늦게까지 하는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요? 거기서 손도 좀 더 잡고, 나란히 앉아있다 몰래 입맞춤도 좀 하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카가미 군?”
“어, 어….”
“카페가 아니라 룸카페면 더 좋습니다! 아카시 군이라면 24시간 하는 곳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죠! 아니면 그냥 둘이 손잡고 어디론가 도주해도 좋고! 하루 쯤 그렇게 단 둘이 늦은 밤까지 지내도 좋을 텐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만 이렇게 안달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말이죠!”
“저기, 쿠, 쿠로코….”
“그러다 모텔이든 호텔이든 저희 집이든 갈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왜 사람이 꼭 그 날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예? 그것도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로요? 저는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오히려 감질나서 진이 빠질 지경이에요! 연인다운 낮 데이트 이만큼 해봤으면 밤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야하는데 왜 거기까지 나가지를 못하냐고요!”
분에 못 이긴 쿠로코가 테이블을 쾅쾅 쳤다. 안절부절 못하던 카가미가 진정하라며 쿠로코를 말렸다. 마지바의 모든 사람들이 룸카페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쿠로코와 카가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코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댔다. 카가미의 얼굴은 창피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아카시한테 그렇게 얘기했어?”
“미쳤습니까? 부끄럽게 어떻게 말해요. 그냥 아카시 군이 너무 착해서 제가 힘이 드니까 만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헐…. 그렇게만?”
“그럼 여기서 더 어떻게 얘기합니까?”
“너무 돌려 얘기한 것 같아서.”
“아카시 군은 이렇게 얘기해도 알아들을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해 카가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쪼로록, 조용해진 둘 사이에 쿠로코가 바닐라 셰이크를 마시는 소리만이 울렸다. 곱게 두 손을 모으고 쿠로코의 눈치를 보던 카가미가 우물우물 물었다.
“쿠로코 너는 괜찮아?”
“뭐가요?”
“아카시 안 만나도.”
“아카시 군이 이렇게 절 포기할 사람입니까? 다시 찾아오겠죠. 해답 찾으면 오라고 했습니다.”
“아.”
카가미는 그렇게 알아서 해결할 거면 왜 나까지 끼어들게 하는 거냐, 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다만 대신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미 다 식어버린 치즈버거를 주섬주섬 집어 들어 포장지를 벗겨냈다. 이거나 먹자…. 쿠로코도 별 말 않고 가만히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부아아앙-!
“뭐야?”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나, 싶어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는데 거대한 엔진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와아앙, 와앙-! 하고 울리는 소리가 보통 쩌렁쩌렁한 게 아니라서 모두가 의아해하며 밖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끼이익-!
딱 봐도 잘 빠진 라인과 웅장한 엔진 소리. 날렵하고 매끈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색 핫 바디의 바이크가 엄청난 마찰음을 내며 아슬아슬한 간격을 남기고 마지바 앞에 섰다. 그 과정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날쌔고 민첩해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어느 몇몇은 이미 밖으로 나가서 구경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개념 없이 시내에서 이렇게 난폭운전을 하는 건지 얼굴이나 보자 싶은 카가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쿠로코도 슬그머니 따라 나왔다.
바이크는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웅, 웅 하는 소리를 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엄까지 느껴지는 겉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딱 봐도 값 좀 나갈 것 같았다는 거다. 이런 걸 누가 탔나 싶어 시선을 옮기는데 땅을 딛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갈색의 워커를 따라 올라가니 전체적인 키에 비해 길고 쭉 뻗은 다리와 무릎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찢어져 있는 블랙 데미지진 안으로 촘촘한 근육이 보였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다리인데, 싶은 카가미가 눈을 크게 뜨며 바이크의 주인을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가 새카만 헬멧을 벗었다.
헬멧이 벗겨지자마자 보인 건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는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보다 더 영롱하게 빛나는 저 붉은 눈! 날렵한 콧날, 턱선까지! 카가미는 그것들의 주인을 아주 잘 알았다.
“아, 아카시!”
“여, 카가미. 오랜만이야.”
“너…, 너!”
기겁해 말을 잇지 못하는 카가미와 달리 아카시는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곤 바이크에 달린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아카시는 답지 않게 라이더 재킷에 가죽 장갑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아카시가 이렇게 입은 건 처음 보는데도 위화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카가미가 경악을 했다. 그럼에도 아카시는 느긋하게 멋을 부렸다. 흐음. 오늘 머리를 좀 올려봤는데. 어때, 괜찮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카가미는 여전히 똑같은 상태였다. 쯧. 아카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어디 가서 그런 얼빠진 표정 지으면 바보라는 소리 들어, 카가미.”
“하?”
“이미 바보인데요, 뭐.”
“쿠로코!”
“테츠야!”
카가미 뒤에 숨어있던 쿠로코가 나와 아카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하려고 했다. 카가미의 어깨 때문에 아카시의 얼굴만 보였던 쿠로코는 그 때 제대로 아카시의 차림을 보았다. 세상에… 쿠로코의 눈이 카가미의 눈만큼 커졌다.
딱 보기 좋게 마른 다리에 쫙 달라붙는 저 바지,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벨트, 허리와 반대로 떡하니 벌어진 어깨에 자로 잰 듯 딱 맞는 가죽 라이더 재킷. 움푹 파여 섹시하게 드러난 쇄골.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긴 이마를 훤히 드러낸 저 머리 스타일까지! 어떻게 저렇게 섹시할 수가 있나요! 쿠로코는 속으로 감격하고 말았다.
한편 아카시는 아카시 나름대로 오랜만에 쿠로코를 만나 감격한 상태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카가미가 슬금슬금 물러났고 쿠로코가 느릿느릿 아카시한테 다가갔다. 쿠로코를 향해 아카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아카시 군…!”
“오랜만에 봐도 귀엽고 사랑스럽네, 테츠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아…. 네가 그렇게 말을 하고 가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겠어.”
“아카시 군….”
아까보다 더 감격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쿠로코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아카시는 휙 소리가 나도록 쿠로코의 허리를 팔로 끌어안고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곤 쿠로코와 눈을 마주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쿠로코. 이제 네 마음 다 알았어.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을게. 오늘보다도 더 노력할 거야. 이제 착하기만 한 아카시 세이쥬로는 없어."
“아카시 군…?”
"세상에 둘도 없을, 너만의 나쁜 남자가 되어 보이겠어.”
"흐, 아카시 군!"
...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인마… 카가미의 애타는 마음속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한 쿠로코가 껌뻑 넘어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아카시의 목을 세게 끌어안기까지 했다. 쟤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끌어안는 거야. 카가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 멀리서 여기 사람들 너네 구경하고 있는데! 하고 소리쳤지만 이미 둘만의 세계를 형성한 아카시와 쿠로코에겐 안타깝게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카시가 쿠로코를 끌어안은 채 버터 바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랑… 위험한 데이트 할까?”
우엑. 카가미를 비롯,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저게 뭐냐며 전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아카시에게 또 한 번 반한 쿠로코는 찡긋, 윙크를 하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입을 맞췄다.
“좋아요.”
쿠로코가 아카시의 뒷자리에 휙 올라탔다. 아카시는 꿀이 떨어지는 눈빛을 하고는 네 안전이 제일이라며 쿠로코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부릉부릉, 요란하게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쿠로코의 팔이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자마자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지바 앞을 떠나갔다. 쿠로코는 아카시 군, 달려요~ 따위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은 엄청난 소란이 휩쓸고 간 자리를 내려다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카가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측은함, 불쌍함, 동정심 등등이 담겨 있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는 카가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부끄럽고 황당한 마음을 담은 처절한 소리가 울렸다.
“쿠로코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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