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황제의 관을 쓰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너무 푸르러 검은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사각형의 관. 그 끝에 드리워진, 아오미네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열두 가지 색의 옥구슬들. 건장하고 단단한 어깨 위에 꼭 맞게 걸쳐진 푸른빛의 구장복. 신이 내린 황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그 앞에서 한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반드시,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고.
태평성대를 물려주신 선황폐하 덕에 아오미네도 역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쿠로코는 곁에 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등용을 위해 공부했다. 그 결과, 대사간을 보좌해 원내 사무를 지휘하고 간쟁과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사간으로 아오미네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롯이 혼자 노력해 얻어낸 성과였다. 아오미네는 기특하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쿠로코도 기쁘게 마주 웃었다.
아오미네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신하가 되었다지만 둘의 관계에 크나큰 변화는 없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들 몰래 주고받는 서로만의 눈인사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찔하지만 달콤했다. 자신의 입장 상 쓴 소리를 하러 무거운 마음을 지고 편전에 들렀다가도 괜찮다, 너그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사르르 녹아내리기도 했다. 보고가 끝나고 살포시 입 맞추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마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는 그대도 웃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그러나.”
“… 말을 꺼낸 제가 잘못입니다.”
“알았으면 그냥 받도록 해. 나는 더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폐하께서는 자제하는 법을 좀 배우셔야겠습니다.”
쿠로코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오미네도 즐거운 듯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다음 안건은 …. , 웃으며 상소문을 넘기던 쿠로코가 멈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챈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손에서 홱, 상소문을 빼앗았다. 쿠로코가 달라는 듯 양손을 내밀었지만 아오미네는 그저 재빠르게 상소를 읽을 뿐이었다. 쿠로코는 낭패라는 듯 어두워진 얼굴로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었다. 아오미네가 상소문을 다 읽자마자 탁자에 거칠게 팽개쳤다.
“쯧…! 내 그리 일렀건만!”
“폐하….”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내일 조회 때 내 직접 이 안건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너…!”
“… 다음 후대을 위해서라도, 후궁을 들이는 일은 중요합니다, 폐하. 황후마마 책봉은 더더욱요.”
머뭇거리던 쿠로코가 입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아오미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손도 보셔야지요…. 폐하를 닮은 멋진 왕자님 말입니다.”
아오미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쿠로코가 차마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순간 아오미네가 거칠게 쿠로코의 팔을 잡아채고는 반대 손으로 턱을 붙잡아 저를 보게끔 고개를 들게 했다.
“진심으로 이르는 것이냐.”
“… 진심입니다.”
“하…!”
“… 폐하.”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진심이다? 그대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
쿠로코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대가 슬퍼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후궁도, 황후도 들이지 않아. 내겐 테츠, 너밖에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하지만…!”
후사는 어쩌실려고 그럽니까, 뒤에서 도는 소문은요.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얼굴을 놓고 돌아서버리는 아오미네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만 돌아가거라. 지금은 그대 얼굴 보고 싶지 않느니.”
단호히 말하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입을 꾹 다문 채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요동치는 감정과는 달리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예뻐서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입조심을 하니 아오미네는 몰랐지만 노출되어있는 쿠로코는 알고 있었다. 궁 안의 사람들이 자신과 아오미네 사이를 의심하며 뒤에서 수군대고 있다는 걸.
소문을 들은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유난히 기척이 약한 탓에 사람들은 쿠로코가 바로 옆까지 다가오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 때도 평소처럼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면 될 걸, 귀에 박히는 폐하라는 단어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남색을 밝히신다더라, 사간이 정무 보고를 끝내고 나면 침전으로 데려가 물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밀애를 즐긴다더라. 그리고 비역질까지… 쑥덕쑥덕.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쿠로코의 가슴을 후려쳤다. 놀란 가슴 추스리지도 못한 채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다. 집으로 와서도 쿵쾅이는 심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댄 쿠로코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금세 눈물이 차올라 아른아른한 시야에 즉위식의 늠름한 아오미네가 아른거렸다.
내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 다짐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쿠로코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그 분의 인생에 있어 큰 오점으로 남는다는 그 사실이 쿠로코를 힘겹게 만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웃어주시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선명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알지 못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두근거리는 심장은 현실을 부정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마음을 쏟은 사람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 쿠로코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후로부터 아오미네와 정무 외에는 만나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원인을 캐묻는 아오미네에게 아무 일도 없다, 그저 바쁠 뿐이라고 대답할 때면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꾹 참고 덤덤한 척, 괜찮은 척한 척 회의에 참석할 때면 후궁과 황후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매일 빗발쳤다. 방금처럼 아오미네가 노여움을 터뜨린 이유였다. 내일 아침 정무에서 제발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가길. 이 와중에도 후궁을 들이겠다는 말만은 않길 바라는 자신이 한심해 쿠로코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날이 밝고, 쿠로코가 다시 한 번 관복을 정갈하게 정리한 후 정전에 들자 그 사이 소문이 불어났는지 꽂히는 시선이 더 따가웠다. 복도를 지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사람들은 쳐다보다 이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쿠로코는 덤덤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황제폐하 납시오-!”
정전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아오미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제 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도 붉은 용포가 참으로도 잘 어울리구나, 하고 생각했다. 금색 실로 날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이 수놓아진 붉고 화려한 용포는 아오미네의 기품 넘치는 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저 용포를 벗게 만들 일이 없길. 쿠로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오미네가 회의를 시작을 알렸다.
백성들의 세금 문제, 소작료 비율 등의 문제가 오가고 아오미네는 언제나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회의가 끝나가고,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쿠로코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찰나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내 후사에 대해 걱정이 많다 들었소.”
올 게 왔구나. 쿠로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짐은 후궁도, 황후도 들일 생각이 없소. 그러니 이제 상소를 올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신하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폐하, 다음 왕위를 위해서라도 후사를 보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전체적으로 전국에 방을 붙여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의 연을 엮고 싶소.”
“폐하,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나라 일은 그대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도 이것만은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삼삼오오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하, 백성들이 민심이 안정되니 나라의 어머니인 황후마마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후사를 보셔야 왕위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사옵니다.”
폐하! 폐하!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불러대는 소리에 아오미네가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쿠로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소!”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오미네가 날카롭게 신하들을 훑어보았다.
“짐은 더 얘기할 게 없소이다. 그만들 하고 물러나게. 이 이상 얘기하면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경고하는 아오미네의 눈빛이 매서워 신하들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쭈물 전부 눈치만 보던 와중, 처음 운을 떼었던 신하가 흘깃 쿠로코를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궁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알고 계시옵니까.”
“소문?”
“폐하께서 최근 남색을 즐기신다는 소문 말이옵니다.”
쿠로코가 몸을 움찔거렸다.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아오미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내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다 말고 사간원의 아이랑 비역질을 하신다더라, 뒷얘기가 많사옵니다.”
“… 그대가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군.”
“다 늙어가는 마당에 폐하를 바른 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소인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용안 앞에서 이를 줄 몰랐기에 다들 경악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가 말을 이었다.
“황후가 싫으시다면 후궁이라도 들여서 후사를 보셔야하옵니다. 폐하께서 제대로 후사를 보신다면 남색을 즐기던, 남창을 부르던 다 문제없을 아니옵ㄴ….”
“이…! 당장 저 자를 쫓아내거라!”
“폐하!”
“뭣들 하지 않느냐! 끌어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남창이라는 말에 아오미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노성을 터뜨렸다. 죄인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던 쿠로코가 소리를 질렀지만 아오미네에겐 들리지 않았다. 분노로 눈가를 붉히며 아오미네가 굳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격노했다.
“짐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소중한 아이다! 네깟 것들이 뭐라고 그 아이를 남창이라 욕하느냐!”
“폐하, 폐하!”
“다시는 이 일을 입에다 올리지 마라!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내 귀에 들어온다면 그 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갈하는 아오미네의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해 모두들 얼어붙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아오미네가 정전을 빠져나갔다. 정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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