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흑] 안식 (2)

단편 2015. 10. 21. 23:19




*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황제의 관을 쓰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너무 푸르러 검은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사각형의 관. 그 끝에 드리워진, 아오미네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열두 가지 색의 옥구슬들. 건장하고 단단한 어깨 위에 꼭 맞게 걸쳐진 푸른빛의 구장복. 신이 내린 황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그 앞에서 한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반드시,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고.

 

   태평성대를 물려주신 선황폐하 덕에 아오미네도 역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쿠로코는 곁에 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등용을 위해 공부했다. 그 결과, 대사간을 보좌해 원내 사무를 지휘하고 간쟁과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사간으로 아오미네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롯이 혼자 노력해 얻어낸 성과였다. 아오미네는 기특하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쿠로코도 기쁘게 마주 웃었다.

 

   아오미네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신하가 되었다지만 둘의 관계에 크나큰 변화는 없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들 몰래 주고받는 서로만의 눈인사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찔하지만 달콤했다. 자신의 입장 상 쓴 소리를 하러 무거운 마음을 지고 편전에 들렀다가도 괜찮다, 너그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사르르 녹아내리기도 했다. 보고가 끝나고 살포시 입 맞추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마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는 그대도 웃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그러나.”

 

   “… 말을 꺼낸 제가 잘못입니다.”

 

   “알았으면 그냥 받도록 해. 나는 더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폐하께서는 자제하는 법을 좀 배우셔야겠습니다.”

 

   쿠로코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오미네도 즐거운 듯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다음 안건은 …. , 웃으며 상소문을 넘기던 쿠로코가 멈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챈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손에서 홱, 상소문을 빼앗았다. 쿠로코가 달라는 듯 양손을 내밀었지만 아오미네는 그저 재빠르게 상소를 읽을 뿐이었다. 쿠로코는 낭패라는 듯 어두워진 얼굴로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었다. 아오미네가 상소문을 다 읽자마자 탁자에 거칠게 팽개쳤다.

 

   “쯧…! 내 그리 일렀건만!”

 

   “폐하….”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내일 조회 때 내 직접 이 안건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너…!”

 

   “… 다음 후대을 위해서라도, 후궁을 들이는 일은 중요합니다, 폐하. 황후마마 책봉은 더더욱요.”

 

   머뭇거리던 쿠로코가 입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아오미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손도 보셔야지요…. 폐하를 닮은 멋진 왕자님 말입니다.”

 

   아오미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쿠로코가 차마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순간 아오미네가 거칠게 쿠로코의 팔을 잡아채고는 반대 손으로 턱을 붙잡아 저를 보게끔 고개를 들게 했다.

 

   “진심으로 이르는 것이냐.”

 

   “… 진심입니다.”

 

   “하…!”

 

   “… 폐하.”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진심이다? 그대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

 

   쿠로코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대가 슬퍼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후궁도, 황후도 들이지 않아. 내겐 테츠, 너밖에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하지만…!”

 

  후사는 어쩌실려고 그럽니까, 뒤에서 도는 소문은요.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얼굴을 놓고 돌아서버리는 아오미네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만 돌아가거라. 지금은 그대 얼굴 보고 싶지 않느니.”

 

   단호히 말하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입을 꾹 다문 채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요동치는 감정과는 달리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예뻐서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입조심을 하니 아오미네는 몰랐지만 노출되어있는 쿠로코는 알고 있었다. 궁 안의 사람들이 자신과 아오미네 사이를 의심하며 뒤에서 수군대고 있다는 걸.

 

   소문을 들은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유난히 기척이 약한 탓에 사람들은 쿠로코가 바로 옆까지 다가오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 때도 평소처럼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면 될 걸, 귀에 박히는 폐하라는 단어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남색을 밝히신다더라, 사간이 정무 보고를 끝내고 나면 침전으로 데려가 물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밀애를 즐긴다더라. 그리고 비역질까지… 쑥덕쑥덕.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쿠로코의 가슴을 후려쳤다. 놀란 가슴 추스리지도 못한 채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다. 집으로 와서도 쿵쾅이는 심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댄 쿠로코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금세 눈물이 차올라 아른아른한 시야에 즉위식의 늠름한 아오미네가 아른거렸다.

 

   내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 다짐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쿠로코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그 분의 인생에 있어 큰 오점으로 남는다는 그 사실이 쿠로코를 힘겹게 만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웃어주시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선명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알지 못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두근거리는 심장은 현실을 부정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마음을 쏟은 사람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 쿠로코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후로부터 아오미네와 정무 외에는 만나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원인을 캐묻는 아오미네에게 아무 일도 없다, 그저 바쁠 뿐이라고 대답할 때면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꾹 참고 덤덤한 척, 괜찮은 척한 척 회의에 참석할 때면 후궁과 황후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매일 빗발쳤다. 방금처럼 아오미네가 노여움을 터뜨린 이유였다. 내일 아침 정무에서 제발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가길. 이 와중에도 후궁을 들이겠다는 말만은 않길 바라는 자신이 한심해 쿠로코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날이 밝고, 쿠로코가 다시 한 번 관복을 정갈하게 정리한 후 정전에 들자 그 사이 소문이 불어났는지 꽂히는 시선이 더 따가웠다. 복도를 지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사람들은 쳐다보다 이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쿠로코는 덤덤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황제폐하 납시오-!”

 

   정전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아오미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제 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도 붉은 용포가 참으로도 잘 어울리구나, 하고 생각했다. 금색 실로 날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이 수놓아진 붉고 화려한 용포는 아오미네의 기품 넘치는 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저 용포를 벗게 만들 일이 없길. 쿠로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오미네가 회의를 시작을 알렸다.

 

   백성들의 세금 문제, 소작료 비율 등의 문제가 오가고 아오미네는 언제나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회의가 끝나가고,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쿠로코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찰나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내 후사에 대해 걱정이 많다 들었소.”

 

   올 게 왔구나. 쿠로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짐은 후궁도, 황후도 들일 생각이 없소. 그러니 이제 상소를 올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신하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폐하, 다음 왕위를 위해서라도 후사를 보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전체적으로 전국에 방을 붙여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의 연을 엮고 싶소.”

 

   “폐하,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나라 일은 그대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도 이것만은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삼삼오오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하, 백성들이 민심이 안정되니 나라의 어머니인 황후마마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후사를 보셔야 왕위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사옵니다.”

 

   폐하! 폐하!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불러대는 소리에 아오미네가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쿠로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소!”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오미네가 날카롭게 신하들을 훑어보았다.

 

   “짐은 더 얘기할 게 없소이다. 그만들 하고 물러나게. 이 이상 얘기하면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경고하는 아오미네의 눈빛이 매서워 신하들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쭈물 전부 눈치만 보던 와중, 처음 운을 떼었던 신하가 흘깃 쿠로코를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궁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알고 계시옵니까.”

 

   “소문?”

 

   “폐하께서 최근 남색을 즐기신다는 소문 말이옵니다.”

 

   쿠로코가 몸을 움찔거렸다.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아오미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내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다 말고 사간원의 아이랑 비역질을 하신다더라, 뒷얘기가 많사옵니다.”

 

   “… 그대가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군.”

 

   “다 늙어가는 마당에 폐하를 바른 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소인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용안 앞에서 이를 줄 몰랐기에 다들 경악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가 말을 이었다.

   

  “황후가 싫으시다면 후궁이라도 들여서 후사를 보셔야하옵니다. 폐하께서 제대로 후사를 보신다면 남색을 즐기던, 남창을 부르던 다 문제없을 아니옵ㄴ….”

 

   “이…! 당장 저 자를 쫓아내거라!”

 

   “폐하!”

 

   “뭣들 하지 않느냐! 끌어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남창이라는 말에 아오미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노성을 터뜨렸다. 죄인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던 쿠로코가 소리를 질렀지만 아오미네에겐 들리지 않았다. 분노로 눈가를 붉히며 아오미네가 굳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격노했다.

 

   “짐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소중한 아이다! 네깟 것들이 뭐라고 그 아이를 남창이라 욕하느냐!”

 

   “폐하, 폐하!”

 

   “다시는 이 일을 입에다 올리지 마라!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내 귀에 들어온다면 그 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갈하는 아오미네의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해 모두들 얼어붙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아오미네가 정전을 빠져나갔다. 정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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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

[청흑] 안식 (1)

단편 2015. 10. 21. 23:07


*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국가를 지켜주는 문이자 궁으로 들어가는 문. 남들이 그렇게 높디높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궐문은 어린 쿠로코에겐 목이 빠질 만큼 고개를 들어야하긴 해도 심리적으로는 그렇게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서 열리기를 바랄 뿐.

 

   "그렇게 황태자 전하가 좋으냐, 테츠?"

 

   형들에게는 엄하고 엄하시지만 저에게만은 한없이 따뜻한 아버지가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쿠로코가 방긋 웃었다.

 

   "좋습니다. 저는 남자인데도 늘 예쁘다, 어여쁘다 해주시는 분입니다."

 

   쿠로코는 아버지를 따라 작은 손으로 꼭 붙잡고 종종 놀러가는 궁이 참 좋았다. 저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문이 열리고 나면, 늘 자신을 반겨주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간간히 쿠로코를 데리고 등청할 때면 폐하께서도 친히 왕세자 저하의 손을 붙잡고 문 언저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처음 궁을 방문했을 땐 성은에 감읍하다, 허리를 숙이는 아버지의 옷자락 뒤에 숨어 쿠로코는 댕그란 눈만 데굴데굴 굴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고 계신 폐하의 기백에 눌려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여 더듬더듬 인사를 하니, 마냥 귀여웠던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손길에 확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그 때. 숙인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건 제 손보다 한 뼘 정도 커 보이는 까무잡잡한 손이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손과 같은 피부색의 다부진 얼굴, 장난기 주렁주렁 달린 눈매. 저보다 조금 큰 키, 그리고 씩 웃는 얼굴.

 

   쿠로코는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작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흠칫, 정신을 차리니 소년이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젓곤 허리를 숙여 쿠로코를 마주보았다. 쿠로코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지그시 지켜보던 소년이 입꼬리를 더 올려 웃으며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난 아오미네 다이키, 장차 이 나라의 주인 될 사람이다.”

 

   쿠로코가 머뭇거리자 아오미네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깨지고 말랑한 흰 손이 제 손을 답싹 잡아오자 아오미네의 눈매가 만족스러운 듯 가늘어졌다. 잘했다는 듯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쿠로코는 그저 웃어주는 아오미네가 겨울날 따사로운 햇빛보다도 마냥 눈부신데다가, 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이 강하고 단단해 홀린 듯 양손으로 한껏 붙잡았다. 울렁이는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더 방문한 궁에서, 아버지 옷자락을 놓고 아오미네의 손을 잡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둘은 아오미네가 머물던 거처의 뜰에서 자주 놀곤 했다. 겨우내 한껏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새로운 생명이 움틀 때 즈음, 쿠로코는 평소처럼 아오미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오미네가 옷자락에 손바닥을 슥슥 문대고 쿠로코의 작은 손바닥을 감싸듯이 쥐었다. 아오미네의 손은 첫 만남 때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따듯한 봄바람이 둘의 뺨을 간지럽혔다.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벚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다. 보러가지 않으련?”

 

   “좋아요.”

 

   종종걸음으로 좇아간 뒤뜰에는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양 팔을 뻗어 껴안아도 모자랄 듯 한 커다란 나무에 하이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을 쿠로코는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아오미네가 웃었다.

 

   “맘에 드느냐.”

 

   “예, 저하. 벚꽃이 정말 예쁩니다!”

 

   벚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지 않게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코에 아오미네가 다시금 낮게 웃었다. 쿠로코는 신이 나 나부끼는 벚꽃 잎 사이로 뛰어들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꽃잎을 좇아 사뿐사뿐 발을 놀리는 모습이 작은 나비인 양 사랑스러웠다. 잠깐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아오미네도 꽃잎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쿠로코가 허릴 숙여 꼬물꼬물 무언가를 집어 들고 아오미네에게 다가왔다. 쑥쓰러운 듯 한동안 등 뒤에 감추고 머뭇거리다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벚꽃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가지였다. 놀란 아오미네가 눈을 크게 떴다.

 

   “나에게 주는 것이더냐.”

 

   끄덕끄덕. 눈을 꼬옥 감은 채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흔드는 쿠로코가 참으로 사랑스러워 아오미네는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흠칫 놀라던 쿠로코가 잠시 후 얌전히 팔을 들어 허릴 껴안고는 꺾은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며 품 안에서 웅얼거렸다. 오랫동안 궁에서 살며 만나보지 못했던 순수하고 맑은 영혼.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욕심이 났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아오미네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작은 몸은 더 가까이 안겨왔다.

 

   “옆에 있거라.”

 

   “…?"

 

   “평생 내 옆에 있어.”

 

   “저하…?”

 

   “내 나중에 가지에 손이 닿을 만큼 자라면 더 좋은 가지를 꺾어다주마. 그러니 내 옆에 있거라.”

 

  순진한 아이는 말속에 숨은 음험한 소유욕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구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오미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송보송한 살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는 눈매에 빛이 번쩍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소년과 아이는 부쩍 자랐다.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사내의 티가 풀풀 났다. 어깨는 늠름하게 벌어지고, 처음 만났을 때 한 뼘 정도였던 키 차이는 훌쩍 벌어져 1척이 되었다. 늘 아이는 왜 차이가 줄어들지 않냐고 입을 내밀며 가끔 투정을 부렸지만 아오미네에겐 그 모습도 그저 어여쁠 뿐이었다.

 

  “좋지 않으냐. 너를 이리 한품에 안을 수 있고. 나는 테츠가 더 자라지 않았음 좋겠구나.”

 

   하하, 웃으며 자신을 품에 안으려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얼굴을 붉힐 뿐,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쿠로코는 자라면서 감정표현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방긋 웃는 웃음보다도 잔잔히 입가에 미소만 걸치는 일이 많아졌는데 아오미네는 그게 아쉬워 부러 방금처럼 과장된 행동이나 말을 하곤 했다. 쿠로코는 핀잔을 주면서도 노력에 답해주듯 아침 햇살처럼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평생 옆에서 볼 수 있다면, 아오미네의 바람은 소박하면서도 사치스러웠다.

 

   낮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뒤뜰에 잔디가 푸르게 자라 미지근한 바람에 흔들릴 때면 쿠로코는 잔디 위에 앉아 책을 읽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집안의 자제답게 또래들은 어렵다, 혀를 차는 책도 끝까지 붙잡고 읽어나갔다. 집중할 때면 자신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만 뚫어져라 보는 쿠로코의 곁에서 아오미네는 서운하면서도 정갈한 옆모습이 또 곱고 고와서,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숨죽여 바라보곤 했다.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불쑥 아오미네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쿠로코가 의아한 듯 아오미네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오미네가 이전의 그 얼굴 그대로 씩 웃고는 덥썩 쿠로코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당황한 쿠로코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 남들이 체통 없다 욕합니다.”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나는 곧 황제가 될 사람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날 쳐다보지도 않으니 그런다.”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문 쿠로코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오미네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뚫어져라 사랑스러운 얼굴을 응시했다. 테츠,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에 입술이 간지러웠다. 테츠. 이름이 불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눈매가 어여뻤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독점욕 가득한 시선에 쿠로코가 슬쩍 눈을 피하자 아오미네가 덥썩 쿠로코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저하…!”

 

   “쉿.”

 

   저를 부르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적당히 도톰해 구미를 돋우었다. 아오미네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정처 잃은 듯 떨리던 쿠로코의 눈꺼풀이 감겨들고,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워지다 하나로 합쳐졌다. 겹쳐진 입술이 심장이 뛰듯 욱신거리면서도 간질간질했다. 맞닿은 쿠로코의 입술이 약간은 가칠하고, 손끝엔 긴장해서 굳어진 쿠로코의 목이 느껴져 아오미네는 입을 맞댄 채 피식 웃었다. 공기가 빠지는 그 소리에 쿠로코가 번뜩 눈을 뜨더니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뒤로 빼려 움찔거리며 힘을 줬다. 하지만 여전히 붙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 덕분에 쿠로코는 동그랗게 떠진 눈과 단풍잎처럼 물든 얼굴을 고스란히 아오미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쿠로코가 눈을 내리떴다.

 

   “그만 좀 놀리세요.”

 

   “테츠가 너무 귀여운 걸 나더러 참으라고 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

 

   “아직도 제가 그렇게나 어여쁩니까.”

 

   당황한 나머지 평소에는 뱉을 엄두도 못 냈을 말을 하며 쿠로코가 눈가를 찡그렸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아오미네가 나른하게 코끝을 부비며 하늘색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어여쁘다. 홍시처럼 깨물고 싶게 달아오른 뺨도 예쁘고, 오롯이 나만 담고 있는 네 물빛 눈동자도 예쁘다. 앙증맞은 코는 귀엽고 앵두같은 입술은 먹음직스럽다.”

 

   “….”

 

   “입맞춤은 몇 번 해봤는데도 여전히 처음처럼 몸을 굳히는 네가 그냥 사랑스럽다.”

 

   다시 말을 잃고 터질 듯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무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몸을 돌려 쿠로코의 허리를 껴안았다.

 

   “네가 좋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대가 좋았어.”

 

   “….”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상대에게서 한동안 대답이 없자 아오미네가 눈만 들어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아직 붉은 얼굴을 한 쿠로코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오미네가 얼른, 속삭이듯 채근하자 쿠로코의 고개가 푹 숙여지고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왔다.

 

   “저도, 저도 저하가 좋습니다.”

 

   “….”

 

  “알면서 물어보지 마세요.”

 

   부끄러워 귓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들 생각도 않는 쿠로코를 환한 미소를 지은 아오미네가 세게 끌어안았다. 말을 들은 것뿐인데도 입안이 달달했다. 아랫것들이 수근거려도 상관없었다. 품안의 제 사람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웠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하길. 풋풋한 어린 연인은 서로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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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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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흑] Lunch time

단편 2015. 9. 29. 23:30
   맛있는 밥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삶이 단순하고 지루해질 수록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난다. 새로운 식감, 입을 가득 채우는 재료 본연의 맛, 눈을 사로잡는 가지각색의 외관까지. 좀 더 맛있고 신선한 음식을 찾아 헤매는 일은 기대감을 동반한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특히나 틀에 박힌 삶을 사는 회사원에겐 더더욱.

  점심시간인 1시가 되기 30분 전부터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진다. 사원들이 1분마다 한 번씩 시계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휙휙거리는 소리가 잦아질 수록 과장인 미도리마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던 타자를 멈추고 미도리마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시계를 흘긋거리기만 하는 건 귀여운 축이었다. 벌써부터 의자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롯이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쿠로코 대리 뿐이었다. 그게 썩 마음에 든 미도리마는 쿠로코에게 보상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1시 00분 00초가 되자마자 사원들은 재빨리 옷과 지갑만을 챙겨 앞다투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곧 미도리마와 쿠로코만이 남았다. 쿠로코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고 의자를 밀어넣자 그것을 주시하고 있던 미도리마가 쿠로코를 불렀다.

  "어이, 쿠로코."
 
  "네, 과장님."

  "오늘 점심 식사는 같이 하자는 거다. 내가 맛집을 가르쳐주지."

  " ...? 괜찮습니다만."

  "내가 사주고 싶다는 거다. 따라오도록."

  그렇게 말하고서 먼저 자신을 지나쳐 가버리는 미도리마에 쿠로코는 어영부영 빠른 걸음으로 그를 좇았다. 기다려주지 않고 긴 다리로 빠르게 걸어가는 미도리마를 따라가는 일은 쿠로코에게는 꽤 벅찬 일이었다. 어디를 가냐는 질문에도 대답해주지 않으니 그냥 묵묵히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걷던 그가 멈춘 곳은 어느 허름한 가게 앞이었다. 

  "들어가지."

  "네."

  안은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테이블에 사람이 꽉 차있었다는 거다. 둘이 앉을 자리만 빼고.

  "타이밍이 좋았군."

  미도리마가 먼저 가서 자리에 앉자 쿠로코도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맞은 편에 앉았다. 곧 주방 아줌마가 물을 가져다주자 미도리마가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순두부찌개 둘. 메뉴판에 선을 찍찍 그은 아줌마가 주방으로 가자 미도리마가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여기 순두부가 일품이라는 것이야. 쿠로코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쿠로코는 어색함에 눈동자만 굴리다 말고 슬쩍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식당과 묘하게 겹치는 분위기에 쿠로코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과장님은 이런 곳에도 식사하러 오는 구나.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칼질할 것 같은 사람인데,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빤히 미도리마를 바라보고 있는데 미도리마가 눈을 떠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쿠로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애초에 둘이 같이 있던 적이 거의 없던 탓에 시끌벅적한 식당 내에서 둘 사이에만 묘한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끓고있는 뚝배기 두 개가 올라가있는 냄비를 두 사람 앞에 탁탁 놓았다.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미도리마가 먼저 고개를 돌리자 쿠로코도 앞에 놓인 순두부 찌개를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 안에는 새하얀 순두부가 달싹이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빠알간 고추기름과 코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가 저절로 입에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쿠로코는 잘 먹겠습니다, 작게 인사를 하고는 숟가락으로 순두부를 떠 입으로 가져갔다. 혀끝에 닿은 순두부가 씹을 틈도 없이 뜨끈하고 몽글몽글하게 녹아 넘어갔다. 두부 안까지 배인 짭조름한 간이 예술이었다. 두부를 꿀꺽 삼킨 쿠로코가 작게 와, 감탄했다. 미도리마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쿠로코가 순두부찌개를 떠 밥에 비비자 미도리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있다는 것이야."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뿌듯해했다. 소담스럽게 볼을 부풀려 밥을 먹는 쿠로코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순두부찌개를 깨끗이 비웠다.

  극구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미도리마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쿠로코가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은 볼을 하곤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흥. 알았으면 됐다는 거다. 밥 먹는 것에도 인사를 다하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지."

  "과연 그렇군요."

  이 날을 계기로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종종 점심을 함께하곤 했다. 쿠로코가 추천해주는 집을 가기도 하고, 미도리마가 맛집을 안내하기도 했다. 신선한 생과일이 가득한 크레페부터, 정갈한 한정식과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중식, 활어를 잡아 얼큰하게 끓여 나오는 매운탕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시간 반 남짓 되는 점심시간을 미각을 충족하게 채워주는 음식과 함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쿠로코의 자리가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 비어있었다. 나중에 전화가 왔는데 알고보니 감기라 출근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미도리마는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으며 오늘은 전에 먹었던 순두부찌개를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여전히 사원들이 우루루 소란스럽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도리마도 겉옷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왔다. 처음 쿠로코랑 같이 밥을 먹으러 갔을 땐 반팔이었는데 어느덧 쌀쌀해져 자켓을 챙겨야할 날씨가 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나. 미도리마는 쿠로코랑 같이 밥을 먹은 날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여전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순두부 찌개 하나. 주문을 하고 미도리마는 무심코 비어있는 자신의 앞자리를 보았다. 혼자 밥을 먹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는데 오늘따라 빈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낯설어하며 미도리마는 벌써 제 앞에 놓인 순두부찌개를 향해 숟가락을 들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빨간 고추기름도, 뜨끈한 국물도. 몽글몽글한 두부도. 맛있었다. 분명 맛있었는데 뭔가 부족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찌개를 떠먹으며 미도리마는 부족한 게 뭘까 생각했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운 점심이었다.

  쿠로코는 그 날 이후로 이틀을 더 결근했다. 미도리마는 그 이틀동안 쿠로코와 먹었던 음식들을 다시 먹었다. 쿠로코가 맛있다고 추천해 먹었다가 의외로 나쁘지 않게 먹었던 바닐라 쉐이크는 기분 나쁠 정도로 더럽게 달았고 담백하고 건강한 느낌이었던 고등어 구이 백반은 비린내가 났다. 미도리마는 먹다 말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음식이 맛이 없는건지. 미도리마는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다음날, 쿠로코가 출근했다. 며칠 사이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헬쓱해져 있었다.

  "이젠 좀 괜찮냐는 것이야."

  "쉰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미도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가려 몸을 돌리자 쿠로코가 미도리마를 불렀다. 과장님. 미도리마가 몸을 돌려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어제 저번에 과장님께서 맛있다고 추천해주셨던 죽집에서 죽을 사서 먹었는데..."

  "그랬는데?"

  "과장님이랑 같이 갔을 때는 맛이 있었는데 집에서 먹으니 묘하게 뭔가 부족했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네요."

  "... 나도 얼마 전에 순두부 찌개를 먹으러 갔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아...?"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다 갑자기 든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혹시 나 혼자 먹어서 그렇다는 것인가...?'

  '설마 과장님이랑 같이 안 먹어서 맛이 없었던...'

  미도리마는 민망한 기분에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손 끝으로 섬세하게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평소에는 사용하지도 않던 사원용 메신저를 켰다.

  [To. 쿠로코 테츠야. 오늘 점심은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가자는 것이야.]

  띠링. 쿠로코의 컴퓨터에서 맑은 소리가 나고 몇 초 후,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쿠로코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자판을 두드렸다. 잠시 후, 미도리마의 컴퓨터에서 같은 알림음이 들렸다.

  [To. 미도리마 과장님. 좋습니다. 오늘 점심은 굉장히 맛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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