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흑] 병아리 (2)

단편 2018. 3. 26. 22:48

* 대학생 적흑


  쿠로코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오늘은 대망의 조별과제를 하러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아카시와의 약속은 번호를 주고받았던 날부터 한참 뒤인 11월이었다. 대학생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카시는 중간고사 기간까지 일정이 아주 꽉 잡혀있었다. 아카시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밥을 먹다 아카시랑 한 조가 됐다는 말을 이제야 카가미에게 해줬더니 그 둔한 카가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왜 이제야 이야기 하냐며 그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해줬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아카시가 국내 최고 기업인 ‘아카시’의 아카시라는 것, 전 학기 평점 4.5를 유지하며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같이 과제를 하게 되면 수준 차가 어마어마해 같은 조원들이 고생을 제법 한다는 것까지. 대강 학교에서 퍼진 소문에 대해 듣게 된 쿠로코는 입맛이 뚝 떨어져 더 이상 바닐라 쉐이크를 마시지 못했었다.

 

  “저 괜찮을까요…….”

  “힘내. 어떻게든 지나갈 거야.”

 

  쿠로코는 전혀 힘이 생기지 않는 말을 위로랍시고 뱉는 매정한 동기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다 테이블에 엎어졌다. 다른 사람 얘기에 무관심했던 지난날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될 줄이야.


  그 때를 회상하던 쿠로코가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생각해봤자 뭐해. 이미 약속은 잡았고 그 약속은 오늘인 걸. 그리고 조금 쫄았던 첫인상 및 소문과 달리 카톡에서의 아카시 선배님은 배려 깊고 상냥하셨으니까……. 결의를 다진 쿠로코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옷을 몸에 대보았다. 혹시나 선배님한테 복장이 불량하다는 이유 등으로 밉보일 순 없지.

 

  “미리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자신은 꾸미는 것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생 때까지 농구에만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옷은 편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의 소유자여서 대학 입학 전까지 옷장에 있는 옷이라고는 운동복이 다였다. 그나마 입학 전에 모처럼 만난 중학교 동창인 키세가 옷이 이게 뭐냐며 쇼핑몰로 끌고 가준 덕에 그럭저럭 봐줄만한 옷 몇 벌을 살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유명 잡지를 시작으로 데뷔한 키세는 패션 감각이 좋았다. 쿠로코한테 잘 어울리는 옷을 잘 찾아줬다는 소리다. 그런데 모델은 모델인지, 남들은 기피할 과감한 선택을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9월에 한창 자주 입고 다녔던 노란색 후드티도 그의 선택이었다. 편해서 자주 입긴 했지만…….


  그 ‘아카시’ 선배님을 만나는데 후드티만 달랑 입고 갈 순 없었다. 학교도 아니고, 밖에서 보는 거니까. 아카시를 수업 시간에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같이 앉지도 않았고 눈이 마주칠 때 간단하게 목례만 한 게 다였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는 거니 좀 단정하게 입는 게 좋지 않을까 고심하던 쿠로코는 하늘색 면 셔츠에 민트색의 도톰한 가디건, 흰 바지를 입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엔 최선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리한 쿠로코는 현관을 나섰다.

 

  “와아…….”

 

  매표소 앞에 도착한 쿠로코는 순간 내가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카시 선배님은 오늘 데이트가 있으셨던 건가? 여자 친구에게 보낼 카톡을 나한테 잘못 보내셨나? 쿠로코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표를 뽑은 듯한 아카시는 평소 강의 때와는 달리 머리를 까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마마저 저렇게 잘생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쿠로코는 조금 슬퍼졌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은색 정장은 마치 아카시를 위한 옷인 것처럼 완벽한 핏을 자랑했다. 물론 수트 아래, 아카시의 몸매가 탄탄한 탓이기도 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와이셔츠와 부드러워 보이는 넥타이는 보통 좋은 소재가 아닌 듯했다. 마치 새것인 냥 흠집 하나 없는 가죽구두가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만나러 저렇게 입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쿠로코는 계속 망설이며 아카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어떡하지.

 

  “안녕.”

  “헉.”

 

  용케 쿠로코의 위치를 알았는지 쿠로코와 시선이 마주친 아카시가 뚜벅뚜벅 쿠로코의 앞으로 걸어왔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한 향기가 아카시의 걸음을 따라 아찔하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어, 저……. 새삼스럽게 목소리도 너무 잘생겼잖아. 쿠로코는 그만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쿠로코의 행동에 아카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 가까이 성큼 붙었다.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아니, 아니에요. 안 아파요. 근데 선배님…….”

  “음?”

  “오늘 저랑 한 약속 오신 거 맞아요?”

 

  얘가 이걸 진심으로 묻고 있나, 싶은 표정으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던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도 나온 거 아닌가?”

  “아니, 맞는데, 맞는데요……. 너무 멋지게, 하고 오셔서요.”

 

  내가 생각해도 진짜 어이없는 질문이다……. 아카시의 표정에 아차, 싶은 쿠로코가 입술을 말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약속도 기억 못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마른 침을 삼킨 쿠로코가 조심스럽게 아카시의 눈치를 살폈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카시는 제법 기분이 좋아보였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도한 쿠로코가 아카시 몰래 숨을 내쉬었다.

 

  “나 멋져?”

  “네? 네.”

  “다행이네. 오늘 너랑 만나니까 신경 써서 나왔거든.”

 

  왜요? 라는 물음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쿠로코는 묻지 않았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란해진 쿠로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표를 건네며 말했다.

 

  “팝콘 먹을래?”

  “어……, 괜찮은데.”

  “그럼 콜라?”

  “…… 바닐라 셰이크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던 아카시가 풋, 웃었다.

 

  “바닐라 셰이크 좋아하나봐? 알았어. 여기서 잠깐 기다려.”

  “네.”

 

  아카시는 팝콘을 사기 위해 빙글 돌아 걸어가는 것까지 우아했다. ‘gorgeous(고져스)’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환생하면 저런 느낌일까. 자기도 모르게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쿠로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쿠로코랑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다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는 되게 멋진 사람이구나. 잘생긴데다 상냥하기까지 해. 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던 아카시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 쿠로코는 애꿎은 영화 티켓의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무슨 생각해?”

 

  불쑥, 눈앞에 붉은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화들짝 놀란 쿠로코가 이상한 자세를 취하자 아카시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하는 거야. 머쓱해진 쿠로코가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니에요.

 

  “자, 여기 바닐라 셰이크.”

  “감사합니다.”

 

  차가운 바닐라 셰이크를 잡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티켓을 들어 상영관을 확인하려는 찰나, 부드럽게 손목을 쥐어 잡은 아카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야.


  순간 쿠로코는 다시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는 줄 알았다. 선배가, 아카시가 잡은 손목이 화끈거려서 화상을 입는 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정신으로 상영관에 도착해 자리를 찾아 앉았는지 모르겠다. 쿠로코는 등받이에 제대로 기대지도 못하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 앉았다.


  반면 아카시는 여유롭게 다리까지 꼬아 앉아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젊은 재벌 2세가 사장실에 앉는 자세 같다고, 쿠로코는 멍한 머리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과제에 쓸 말이 많을 텐데.”

  “그러게요.”

 

  쿠로코는 아무 말이나 대답하며 스크린에만 눈을 박았다. 무의식적으로 셰이크를 쪽쪽 빨다보니 금방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다행히 아카시는 그 후로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 영화도 계속 보다보니 흥미진진했다. 쿠로코는 영화에 흠뻑 빠진 채 아까보다 편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팔걸이에 슬쩍 걸치고 있던 쿠로코의 팔뚝에 무언가가 닿았다.

 

  “……?”


  아카시의 팔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 봤다가 시야에 들어온 상황에 쿠로코가 다시 허리를 바짝 세우며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할까? 팔을 뺄까? 그랬다 선배님이 기분 나빠하시면 어떡하지? 애초에 팔 좀 닿았다고 피하는 게 일반적인가? 멘붕에 빠진 쿠로코가 겨우 눈동자만 굴려 쳐다본 아카시는 팔이 닿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와 별 다른 점이 없어보였다. 그래, 가만히 있자.

 

  쿠로코는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영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적어도 아카시의 팔이 거기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쿠로코는 다시 영화에 푹 빠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아카시의 팔이 점점 더 닿아왔다. 아니, 기분 탓 아닌 것 같아. 어느 새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아카시의 팔과 쿠로코의 팔이 딱 맞붙었다. 아, 이제 영화고 뭐고 모르겠다. 그냥 빨리 영화가 끝났으면 좋겠는데.


  너무 신경을 써 마비가 온 것 같은 팔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쿠로코는 간절히 빌었다. 아카시랑 닿아있는 부분이 뜨거웠다. 그 열기가 넘실넘실, 넘치다 손까지 차올랐다. 쿠로코는 침을 꿀꺽 삼켰고, 아카시는.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아카시가 느껴지는 순간 쿠로코는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아카시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시야로 들어오는 건 아까와 달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빛을 내는 아카시의 눈동자.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쿠로코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아카시가 쿠로코의 손을 잡아 끌어와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상대의 얼굴이 제법 볼 만 했다. 아카시 입맛을 다시며 쿠로코에게 말없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나갈래?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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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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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시선

단편 2017. 10. 2. 00:14

* 적흑 전력 - 휴일

* 리퀘박스 - 선생님 아카시 x 학생 쿠로코


  햇볕이 뜨겁다. 여름 방학이 끝났는데도 여름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한창 더울 땐 보이지도 않던 매미들이 이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찌르르, 찌르르 운다.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에선 미적지근한 바람만 나와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흔든다. 모두가 더위에 지쳐 미동 없이 책장만 팔락이는 교실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맴도는 소년이 있다.


  아카시는 영어 지문을 유창하게 읽어 내려가면서도 창가 쪽의 앞에서 네 번째 자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자리의 주인공은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양손으로 교과서를 붙잡고 그 사이로 얼굴을 숨긴 채였다. 교과서 위쪽으로 삐죽이 솟아오른 하늘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쿠로코 테츠야. 요즘 아카시의 신경이 쏠려있는 학생이었다. 분명 눈치 채지 않게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책의 양 끝을 잡고 있는 작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게 참 신경이 쓰여 아카시는 지문 읽기를 멈추고 교과서를 교탁 위에 내려두었다.


  왠지 모르겠는데 가슴이 갑갑하다. 더위 탓인가. 평소대로 완벽한 옷차림을 고집하고 있자니 목덜미도 가슴께도, 하다못해 손목을 감싸고 있는 소매마저 갑갑하게 느껴졌다. 에어컨을 켜달라고 건의를 해야겠군. 온몸에 원인 모를 미열이 홧홧하게 오르는 것 같아 아카시는 신경질적으로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카시가 잠시 수업을 멈추자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기력 없이 우는 매미소리만이 교실을 채운다. 학생들은 나른함에 앞의 선생이 수업을 하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다. 아카시는 이러한 상황에 권태를 느끼며 반대쪽 소매를 걷는다. 드러난 팔뚝에 습한 공기가 달라붙는다. 아니, 그리고 하나 더. 팔뚝을 훑는 무언가가 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어도 알 수 있다. 이건 그 아이의 것이다. 몇 번이나 몸으로 받아내었던 시선이다. 부러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자 이때다 싶어 잽싸게 드러난 핏줄을 살피는 눈초리가 느껴진다. 직접 손이 닿은 것도 아닌데 뜨끈한 감각이 아카시를 자극한다.


  걷어 올린 소매를 마무리하며 아카시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교과서 위로 빠끔히 드러나 있던 동그란 눈매가 화들짝 놀라며 책 속으로 숨는다. 그렇게 얼굴을 감춰도 붉어진 귀는 다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다. 고개를 숙이느라 드러난 목덜미가 애처롭게 붉었다.


  저걸 어떡하면 좋지. 손으로 교탁을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아카시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는다. 분명 천장의 페인트 색은 빛바랜 하얀색인데 방금 스치듯 본 붉은색이 아른아른 눈앞을 물들인다. 아, 진짜로 어떡하면 좋지. 소매를 걷기까지 했는데.


  목이, 탄다.


  *


  타박타박. 제 발걸음 소리와 그보다 조금 가벼운 발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보폭을 맞추는 동안 건너듯 본 실내화가 새하얗다. 꼭 제 주인을 닮은 색이어서 아카시는 또 답답해진다. 침을 크게 삼키고 말을 걸어본다.


  “테츠야?”

  “네, 네! 아카시 선생님.”

  “프린트 들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 걸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소년의 얼굴에 수줍음이 가득하다. 프린트물을 받치고 있는 손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잠시도 쉴 줄을 모르고 움직인다. 약간 처진 입꼬리는 말할 게 있는 듯 움찔거리다 파르르 떨린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마냥 아카시의 눈에 슬로우 모션으로 박혀들었다. 아카시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는다.


  “저, 선생님.”

  “응?”

  “저기……. 선생님이 저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몇 번을 오물거리던 입술로 한다는 말이 저 말이다. 부끄러운 발끝이 타닥타닥 어색함을 메꾸려 부러 소리를 낸다. 아카시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목을 죄고 있는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어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하늘색 눈동자가 드러난 목울대를 향한다.


  모를 리가 없잖아.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항상 내 수업을 제일 열심히 들어주는 테츠야인 걸.”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었다는 사실이 기쁜 소년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한껏 상기된다.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가 알아채지 못하게 아카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영어……. 잘 하고 싶거든요.”

  “왜?”


  얘의 영어점수가 몇 점이더라. 분명 평균은 됐던 것 같은데 정확한 점수를 떠올려내느라 아카시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무언가 이유라도 있나? 꿈이 그쪽인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이 없어진 둘 사이로 침묵이 젖어들기도 잠시, 쿠로코가 쑥스러워하면서도 시선을 마주하며 해말갛게 웃는다.


  “칭찬 듣고 싶어요.”

  “……뭐?”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이에요.”


  아, 나는.

  이 아이 앞에서는.

  너무.

  무력해.


  “테츠야. 이번 휴일에 뭐하니?”

  “음……. 딱히 계획은 없는데. 왜요?”

  “선생님이랑 보충 수업할래? 선생님이 테츠야 영어 도와줄게.”


  정말요? 되묻는 쿠로코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가 걸린다. 약간 촉촉하기까지 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서 아카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르 접히는 달콤한 눈동자에 쿠로코가 홀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랑 선생님만요?”

  “그래. 너랑, 나랑.”


  단둘이. 속삭이듯 새어나온 단어에 복숭아 같던 뺨은 잘 익은 홍시로 달아올랐다. 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운 과실인가.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하는데도 주먹을 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축축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은 아카시가 쿠로코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들을 받아 들었다.


  “여기서부턴 내가 들고 갈게. 들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그럼. 이번 주 일요일 3시 쯤 내 수업준비실에서 보자.”

  “네! 그 때 봬요, 선생님!”

  “그래.”


  아카시가 몸을 돌리기도 전 허리를 푹 숙인 쿠로코가 뒤를 돌아 달려갔다. 잰 발걸음이 들뜬 쿠로코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아카시는 피식 웃고는 걸음을 내딛었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테츠야 왔구나. 덥지? 여기 앉아.”

  “감사합니다.”


  에어컨을 틀어 시원해진 공기 사이사이로 아이가 달고 온 뜨거운 열기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손부채질에 팔락팔락 하늘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가 온통 붉었다. 아카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오렌지 주스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받아드는 쿠로코의 손은 하얬다.


  “조금 쉬다 공부할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더 쉬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섬주섬 교과서와 보충 교재, 필통을 꺼내는 모습에 아카시는 쿠로코의 옆에 앉았다. 아카시의 가슴팍이 쿠로코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가까운 거리에서 씻고 나오신 아버지한테서 맡아봤던 스킨 향이 훅, 쿠로코의 코로 끼쳐들었다. 너,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긴장한 작은 몸이 딱딱하게 곧추섰다.


  “여기를 볼까? 여긴 문법이 중요해. 저번 시간에 얘기했지? to 부정사는…….”


  나긋나긋하면서도 적당히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쿠로코의 귓전을 쿵쿵 울렸다. 선생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었나? 교실에서 듣던 것과는 또 다른 생경한 느낌에 쿠로코가 몸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어떡해.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아카시의 목소리가 제 심장을 꽉 잡고 미친 듯이 뛰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제 샤프를 쥐고 있는 날씬한 손가락에 자꾸 눈이 갔다.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 끝과 피부 사이로 비치는 푸른빛의 핏줄. 탄탄한 팔뚝과 참을 수 없을 만큼 섹시한 소매. 풀어 젖힌 옷깃 사이로 보이는 선생님의 쇄골과. 목덜미. 턱. 그리고 입술. 입술. 입술.


  몸을 잔뜩 웅크린 쿠로코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들이마셔지길 반복했다. 습기를 머금은 호흡이 빨라진다.


  유려하게 알파벳을 적어가던 낌새를 알아채고 손이 멈췄다. 집중하지 않았다고 혼나면 어떡하지. 두려워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가쁜 숨은 진정되지 않았다.


  “테츠야.”

  “…… 네.”


  아까보다도 훨씬 잠긴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혼날 거야. 쿠로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뺨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는다. 의아해진 쿠로코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떠진다. 잔뜩 좁아진 눈동자를 담은 붉디붉은 홍채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아카시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선생님이랑…… 좋은 거 할래?”


  습기가,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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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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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병아리 (1)

단편 2017. 10. 1. 01:03

  * 대학생 적흑 


 사랑을 하면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인대! 어디선가 로맨스 소설을 읽고 온 모모이가 외쳤다. 말도 안 돼. 아카시는 현대과학을 믿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아카시에게 하늘이 왜 파란색이냐고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빛의 산란 때문이라 대답할 수 있었다. 산란이 뭔지에 대한 설명은 덤이다. 그런데 뭐? 분홍빛?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카시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 빛내는 모모이에게 찬물을 끼얹을 만큼 차가운 사람도 아니어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모모이, 말하는 도중 미안한데 내가 수업이 있어서…….”

  “아, 미안해! 우리가 너무 오래 잡아뒀지?”

  “아냐, 괜찮아. 오랜만에 같이 밥 먹어서 즐거웠어.”


  이따 보자, 아카시. 심드렁하게 있던 아오미네가 인사를 건넨다. 아카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라면 다음 강의까지 같이 좀 노닥거렸겠으나 이번학기는 추가 학점을 더 듣고 있기에 좀 바빴다. 교양이라 다행이지. 아카시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9월의 날씨는 참 좋았다. 아직까지 잔재하는 여름의 뜨거운 열기보다도 서늘해진 공기가 더 실감났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이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사한다. 하늘은 파랗게 물들었고 눈부신 햇빛은 머리칼에 닿아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웃으며 지나가는 학우들의 옷에는 단풍이 들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선연해진 가을을 바라보던 아카시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강의실을 찾았다.


  108, 108……. 아, 여기군. 오랜만에 찾아온 교양 강의실은 책걸상을 싹 바꿨는지 훨씬 깔끔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평평했던 강의실이 계단식으로 바뀌기 까지.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던 아카시는 중간보다 약간 뒤쪽 좌측 편에 자리를 잡았다. 학번과 학년을 고려한 위치였다. 


  아카시가 자리에 앉자 들어올 때부터 술렁이던 학생들이 대놓고 흘끔거리며 아카시를 훔쳐보았다. 헉, 그 아카시 선배잖아? 그러게. 이 수업 듣나보다. 대박. 와, 진짜 잘생겼어. 눈매 좀 봐.


  안 들리게 한답시고 속삭이는 목소리임에도 제 얘기인지라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아카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일이 신경 쓰다간 피곤하고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게 뻔했다. 소문답게 풍선처럼 부푼 말들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아카시는 무심한 시선으로 강의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엔 고학년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 강의 조별과제도 있던데 별 일이네. 건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때였다. 문가를 응시하던 아카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건 아까 올려다보았던 가을 하늘이었다. 아카시는 사람의 눈동자가 그렇게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스물 몇 년의 인생에서 처음 살았다. 소년의 눈에는 하늘이 담겨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엔 아직 낮임에도 반짝거리는 별이 떠있다. 하늘에 붓을 휘저어 물에 풀면 저런 색일까. 마치 시리도록 눈부신 블루 토파즈 같았다.


  아카시는 어머니의 보석함에서 블루 토파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저 눈동자 앞에서는 그 어떤 고가의 블루 토파즈도 제 빛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보다 조금 채도가 낮은 색의 머리카락은 잘 마른 듯 붕붕 떠있다. 봄의 햇빛 냄새가 물씬 풍길 것 같은 보송함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앳되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에서 우유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카시는 손가락으로 코를 문질렀다.


  매력적이네, 표정은 아까와 별 다를 바 없이 무심했으나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흥미를 숨길 줄 몰랐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강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저 예쁜 보석의 주인을. 자신만 빼고.


  그가 다가가자 언제 왔냐는 듯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한 학생의 표정이 웃겨 아카시는 자기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게 신기해 아카시는 이제 대놓고 그 아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쿠로코 테츠야.”

  “네.”


  이름이 테츠야구나. 가타카나인가? 아카시는 テ, ツ, ヤ 세 글자를 끄적끄적 적어보았다. 역시 어린 티가 난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테츠야는 1학년이었다. 테츠야, 테츠야. 입안에서 동그랗게 울리는 발음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눈치 챘는데 테츠야는 꼭 저같이 깜찍한 노란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품이 제법 넉넉한 게 몸의 선이 얇은 듯했다. 모자에 푹 파묻힌 목덜미가 곧고 가늘어서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목덜미를 쭉 훑었다.


  시선을 느낀 걸까. 테츠야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기 토끼 같은 몸짓이었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아카시가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큭큭 웃었다. 아, 진짜 귀엽다. 쟤랑 조별과제 하면 좋겠다. 빠끔히 드러난 아카시의 두 눈이 빛났다.


  “안녕하세요,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거 봐. 뭐랬어. 내가 쟤랑 하고 싶댔잖아. 아카시는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테츠야한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산 아카시에게 있어 테츠야와 같은 조를 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정확히는 빡세기로 유명한 아카시와 같은 조를 지원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고, 쿠로코는 쿠로코의 존재를 알아챈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조 편성에 참여하지 못한 거였지만.


  하필 또 공교롭게 조를 짜지 못하고 남은 사람이 두 사람 뿐이었으며 어차피 한 조당 정원은 3명이라 2명도 괜찮다고 교수님이 봐주신 덕에 둘은 그렇게 같은 조가 되었다. 눈앞의 1학년은 아카시를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1학년이에요.”


  얘는 왜 목소리도 귀엽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와중에도 아카시는 나는 3학년이에요, 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 손은 작지만 제법 강단 있게 뼈마디가 잡혔다. 조금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아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저기, 아픈데요.”

  “아, 미안해요.”


  빠른 사과에 쿠로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 앞임에도 긴장하지 않고 덤덤한 모습이 신기해 아카시는 또 무심코 쿠로코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선배님? 맙소사. 이제는 남자애가 고개 갸우뚱하는 것도 귀여워 보이네. 아카시가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 때 쯤 쿠로코는 쿠로코대로 조금 겁을 먹고 말았다.


  붉은 머리칼과 홍채의 소유자는 강렬한 첫인상답게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적당히 듣기 좋게 만들어진 목소리 등이 보통 철저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이 보였다. 저 조별 과제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 사람의 기준을 만족 시킬 수 있을까요, 카가미 군……. 점심 먹을 시간이 없다며 홀랑 다른 교양으로 옮겨버린 제 동기가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무서워 보이는 선배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 없이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좁은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할 때마다 더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쿠로코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 덤덤한 표정이 아카시 입장에서는 눈앞의 1학년이 묵묵한 게 저만 보면 안절부절 못하는 동기들보다도 더 기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음을 불행히 쿠로코는 알지 못했다. 아카시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고, 결국 참지 못한 쿠로코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 과제는…….”

  “아, 과제.”


  답지 않게 정신을 놓고 있었다며 화들짝 - 쿠로코가 보기엔 아무 변화 없었지만 - 놀란 아카시가 얼른 강의 계획서를 집어 들었다. 영화와 관련된 교양답게 한 조가 다 같이 영화를 보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였다. 물론 인증샷 포함. 역시 교양은 좋구나…. 교양만 들었던 1학년 시절을 떠올리던 아카시는 아까보다 한결 풀린 얼굴로 쿠로코한테 휴대폰을 내밀었다.


  “과제를 하려면 같이 영화를 봐야하네요. 일단 번호 좀 줄래요? 어떤 영화를 볼 지랑 날짜 같은 거 정해야하니까.”

  “네.”


  쿠로코가 휴대폰을 받아 제 번호를 톡톡 쳤다. 소매에 반쯤 감싸져있는 작은 손으로 자꾸 옮겨가는 시선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일단… 내가 또 다음 수업이 있어서. 끝나고 연락할게요.”

  “네, 선배님. 저, 그럼 이만….”

  “네. 이따 봐요.”


  꾸벅 인사를 한 쿠로코가 종종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나풀 흩날리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카시의 휴대폰 화면엔 11자리의 숫자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흐음. 휴대폰 액정 위를 뱅뱅 맴돌던 아카시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병아리]


*


22:07 [안녕하세요.] 

22:07 [같은 수업 듣는 아카시 세이쥬로예요.]

22:07 [늦은 시간 미안해요. 이제 일과가 끝나서.]


[아니에요.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22:19


22:20 [그렇구나.]

22:21 [내 번호 010-0411-1220이에요.]

22:21 [저장해둬요.]


[네!] 22:23


  답장이 고분고분 귀엽네. 샤워를 막 끝내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터는 와중에도 아카시는 바쁘게 손가락을 놀렸다.


22:30 [영화 어떤 거 좋아해요?]


[저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22:30

[아, 선배님 말씀 놓으세요.] 22:30


22:31 [그럼 그럴게.]

22:31 [못 보는 영화도 없어?]


[음…. 호러나 공포영화는 잘 못 봐요.] 22:33

[(우는 이모티콘)] 22:33


  푸하. 이런 이모티콘도 쓰는구나. 토끼가 눈물을 줄줄 흘리다 못해 공간을 한가득 채우는 이모티콘에 아카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카톡도 귀여워 죽겠다……. 아카시는 베고 있는 베개가 머리카락의 물기로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카톡 삼매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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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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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어떤 애정

단편 2017. 9. 10. 01:09

  * 리퀘박스 요청 - 대학 졸업 후 달달하게 동거하는 사업가 아카시 x 보육교사 쿠로코

 

  으, 더워. 엘리베이터에도 에어컨을 설치해달라고 할까. 그러게 테츠야가 고집 부려도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야했는데. 시원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하면서 탄 엘리베이터의 공기는 바깥과 똑같이 후덥지근했다. 아카시는 몸을 비틀며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와이셔츠의 목깃을 손가락으로 떼어냈다. 곧, 집에 도착한다.

 

  “으아, 시원하다.”

  “다녀오셨어요, 아카시 군.”

  “다녀왔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마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출근하기 전, 더우면 참지 말고 꼭 에어컨 켜고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고 갔는데 얌전히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쿠로코가 웃으며 아카시를 맞았다. 쾌적한 온도에 저를 반겨주는 사랑스런 애인.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불쾌함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노란 앞치마를 걸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쿠로코는 아주 귀여웠다. 아카시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저녁 준비 하고 있었어?”

  “네. 에어컨 켰으니까 아카시 군이 좋아하는 탕두부나 먹을까 하고.”

  “헉. 좋아.”

  “씻고 와요. 나는 아까 오자마자 씻었습니다.”

  “응.”

 

  웬일로 조용히 대답하기에 바로 씻으러 가나 싶었는데, 쿠로코의 뺨에 따뜻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꾹 닿았다 떨어졌다.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허리에 상대방의 팔도 감긴 채였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쿠로코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다. 아카시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카시 군!”

  “아니, 뽀뽀를 몇 년 째 하는데 아직 부끄러워해?”

  “아무 생각 없이 있는데 하니까 그렇죠!”

  “그럼 지금 또 해도 돼?”

  “빨리 씻기나 하세요!”

  “네, 네.”

 

  쿠로코의 손에 떠밀려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아카시는 즐거운 기색이었다. 장난기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저한테는 소년같이 구는 아카시였다. 이제 진짜로 씻나 싶었는데 아카시가 아차, 하며 뒤돌았다. 쿠로코가 재빨리 아카시를 쳐다본다.

 

  “이번엔 또 왜요.”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겼어.”

  “아,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고마워.”

 

  서랍 안에는 보송하게 말라 가지런히 개어진 빨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사실 집안일은 두 사람이 돌아가며 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카시의 일은 너무 바빴고 어쩔 수 없이 웬만한 일은 다 쿠로코가 하게 되었다. 아카시는 적절하지 못한 분배에 계속 미안해했지만 쿠로코는 솔직히 정말로 괜찮았다. 제 손으로 빤 - 물론 세탁기가 하지만 어쨌든 자기가 세탁기 안에 넣으니까 - 옷을 입고 출근하는 아카시라든지, 손수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아카시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아카시가 씻으러 들어가고 쿠로코는 저녁 차리기를 마무리했다. 쿠로코도 일을 다니다 보니 늘 집안일에 신경 쓸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카시는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너저분해지지 않게 정리해주시는 아주머니를 부를 수 있었다는 소리다. 결국 상차림의 마무리는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오이소박이 같은 기본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고, 제가 육수를 내 마트에서 사온 두부를 담가 끓인 탕두부를 작은 화로위의 뚝배기에 옮기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 2공기까지 나란히 식탁에 올라간다.

 

  혹시나 아쉬울까 싶어 급하게 구운 계란 프라이까지 올리고 나니 저녁상은 제법 소담스러웠다. 쿠로코는 아카시와 따로 나와 산지 몇 년이라 이제 계란 프라이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뭐든지 완벽할 것 같았던 사람은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없었으며 자신은 상대방보다 삶은 계란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나았다. 그 실력은 동거를 하게 된 이후로 일취월장은 아니어도 느릿느릿 성장했고 그 결과물은 딱 먹기 좋게 익은 반숙 후라이였다. 쿠로코가 흐뭇하게 식탁을 내려다본다. 타이밍 좋게 아카시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나.”

  “아카시 군한테서는 좋은 냄새 납니다.”

  “먹고 싶어?”

 

  하여튼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쿠로코가 정색했다. 아카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늘 빨리 씻었네요.”

  “응. 찝찝해서.”

  “덥긴 했죠.”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파바박 털기 시작했다. 머리칼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튀자 쿠로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재 같아요.”

  “이렇게 잘생긴 아재 봤어?”

  “농담도 못하겠네요. 밥이나 먹어요.”

  “응.”

 

  배가 고팠는지 아카시는 얌전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단정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육수에 동동 떠있는 두부가 담백한 맛과 말캉한 식감을 자랑했다. 알 듯 말 듯 볼록하게 올라온 아카시의 볼에 화색이 돈다.

 

  “맛있어. 나날이 실력이 느네.”

  “그런가요?”

  “응.”

  “많이 먹어요. 더울 때는 많이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니까요.”

  “내가 할 소리야.”

 

  원체 양이 적은 쿠로코는 아카시의 절반 정도 되는 양의 밥에도 금방 배불러했다. 오늘도 쿠로코의 그릇에는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아카시가 대답을 하며 그릇에 흘깃 곱지 않은 시선을 준다. 물론 쿠로코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억지로 먹다 탈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조금씩 늘리면 되지.”

  “그것보다, 밥 다 먹으면 줄 게 있습니다.”

 

  쿠로코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은근슬쩍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는 의도를 알았지만 아카시는 그냥 따라가 주기로 했다. 억지로 정량보다 많은 밥을 먹었다가 체해 호되게 고생했던 쿠로코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뭔데?”

  “다 먹으면 줄게요. 두부 식습니다. 어서 먹어요.”

  “응.”

 

  뭘 준다는 걸까. 기대감에 아카시의 젓가락질이 조금씩 빨라졌다. 열심히 씹고 삼키느라 바쁜 아카시를 보며 쿠로코가 보이지 않게 설핏 웃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고맙습니다. 식탁 정리는 제가 할게요.”

  “응.”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식사가 끝나고 아카시는 얼른 손에 고무장갑을 끼웠다. 쿠로코가 빨래에 밥까지 했으니 설거지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터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쿠로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나 다 씻고 갈 테니 소파에서 좀 쉬어.”

  “괜찮아요. 그릇 몇 개 없잖아요.”

  “그래도…….”

 

  쿠로코는 아카시가 설거지를 하는 내내 아카시의 옆에 서있었다. 유치원에서 일하느라 오래 서있는 쿠로코가 다리가 아플까 앉아있으라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쿠로코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오히려 슬금슬금 뒤로 가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아오는 통에 아카시는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일찍 퇴근해주세요.”

  “노력할게.”

 

  폭 묻은 얼굴을 부비작거리며 쿠로코가 중얼거린다. 아카시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는 햇빛에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서늘한 에어컨 공기와 달리 따뜻한 아카시의 체온에 쿠로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이게 바로 행복이지.

 

  “다했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설거지를 끝낸 아카시가 고무장갑을 벗고 뒤로 돌아 싱크대에 몸을 기댄다. 품에 안겨있는 애인의 나른한 표정이 참 귀여워서 아카시는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쿠로코를 끌어안았다.

 

  “테츠야 살 말랑말랑.”

  “은근슬쩍 허리 만지지 마세요.”

  “싫어.”

  “어휴…….”

  “그러는 테츠야도 가만히 있잖아.”

 

  애인이 만져주는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아카시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시선이 입 안에 꿀을 머금은 듯 달콤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쿠로코가 살짝 발돋움을 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다. 깃털같이 포근한 입맞춤이었다. 쿠로코의 허리를 안은 아카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를 넣어 질척한 소리가 나는 농밀한 키스보다도 더 심장 떨리는 접촉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쿠로코였다. 천천히 멀어지는 입술에 아카시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었지만 쿠로코는 단호하게 뒤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아카시도 등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쿠로코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느릿느릿 따라갔다.

 

  “냉장고는 왜?”

  “줄 거 있다고 했잖아요.”

 

  쿠로코가 냉장실도 아닌 냉동실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플라스틱 통이었다. 뭔가 보통 얼음틀보다 훨씬 길쭉하게 생겼는데 그 위로 손잡이 같은 게 대여섯 개 꽂혀있는. 처음 보는 물건에 아카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뭐야?”

 

  대답 대신 쿠로코가 플라스틱 통에 물을 붓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카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한다. 이제 쿠로코는 낑낑거리며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해줄게.”

  “후……. 부탁합니다.”

 

  쿠로코에게 통을 넘겨받아 한 손으로는 길쭉한 부분을 잡고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아카시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왔다.

 

  “어?”

 

  그건 다름 아닌 주황색의 얼음 덩어리였다. 아니, 아이스크림인가? 얼음틀의 모양 그대로 얼은 덩어리를 보던 아카시가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돌아보는 눈동자에 이건 뭐야?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른스러워도 이럴 때는 순진무구한 사랑스러운 소년 같아 쿠로코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이요.”

  “이게?”

  “귀엽죠?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만들어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아카시 군도 좋아할 것 같아 급하게 오렌지 주스로나마 만들어뒀습니다.”

  “오렌지 주스 얼린 거구나…….”

  “보통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아이들한테 재미있고, 시중에 파는 아이스크림보다 몸에 좋은 아이스크림을 먹이기 위해 좀 더 건강한 재료로 만들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카시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런 아카시를 쿠로코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똑똑한 사람이 단순히 오렌지 주스를 얼렸다는 사실에 신기해할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는. 아니, 보통의 가정에서는 이렇게 사소한 먹을거리에도 이걸 먹을 아이들을 생각해 신경을 쓴다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통감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은 살면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을 테니까.

 

  말이 없어진 아카시를 올려다보는 쿠로코의 입이 썼다.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온 길에 파여진 커다란 구멍들을 이렇게 종종 마주하게 된다. 쿠로코는 구멍을 피하기보다는 똑바로 마주하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나마 구덩이를 메꿔주고 싶었다. 아카시의 마음속에 텅 비어있을 부분들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었다.

 

  오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건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가, 쿠로코 테츠야가, 이때까지 당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전부 쏟아 부어 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공허함이 채워지는 날은 있어도 외로워할 날은 없을 미래를, 같이 그려가자고, 그렇게 말하고자 함이었다. 다행히 저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고 제가 어떤 의도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쿠로코의 예상대로, 아카시가 쿠로코를 강하게 끌어안아왔다. 나 이거 처음 먹어보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묻는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저는 아카시 군에 대해 다 알아요. 아카시 군이 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요. 가만히 품에 안겨오며 눈을 감은 쿠로코가 속삭였다. 저를 달래듯 포근한 목소리에 아카시가 쿠로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며 목덜미를 간질이는 붉은 머리칼을 쿠로코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진짜 몸에 좋은 블루베리 요거트로 만들어줄게요. 제가 직접 갈아서요. 오늘은 오렌지 주스로 참아주세요.”

  “응.”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요거트든, 주스든. 하다못해 물이었어도 아카시는 기쁜 마음으로 쿠로코의 사랑을 먹어치웠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제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쿠로코의 진득한 애정에 아카시는 괜히 툭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조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작게 베어 물었다.

 

  “맛있네.”

 

  설탕이라도 탄 듯 다디단, 아주 행복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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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gm : 종현 - Lonely (Feat. 태연)

   * 그냥... 연애에 서툰 적흑이 보고 싶었어요. (  mm)*



  사랑한다는 말은 진부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 가사에서, 드라마에서. 좀 더 보태면 길거리에서조차 사람들이 흔하게 뱉는 말이라고. 남들이 사용하는 가벼운 말로 표현하기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아카시로써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날이 더해지는 마음의 무게는 익숙하지 않아 가둬두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혹시나 입 밖으로 내었다 소중한 마음이 넘쳐흘러 사라져버릴까, 아카시는 어느 순간부턴가 사랑을 입에 담지 않게 됐다. 다만 소복소복 쌓인 감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새어나올 때면 조심히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곤 했다. 그럼 부글거리던 탄산이 얌전해지듯 격정도 가라앉았다.


  습관이 된 행동에 가슴이 잠잠해지면 코르크 마개를 씌운 듯 제 안을 꽉 채우는 마음에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꾹꾹 눌러오고 참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알맞은 표현을 찾게 되면 곱게, 소중하게 키워온 마음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슬프진 않았다. 마음 속 유리병에 찬란히 담겨있을, 어쨌든 사랑인 그것을 꺼낼 날이 언젠간 올 테니까. 완벽해야 할 그 날을 위해 아카시는 더 마음을 고르고 다듬었다.

 

  이렇게 후회할 날이 올 줄은 모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맞은편의 사람이 입술을 앙 다물고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있다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워 손을 뻗었지만 눈물의 주인은 그마저도 쳐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다시 손을 내밀 생각은 못하고 아카시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는 아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 그러니까 쿠로코는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아냈다. 얇고 부드러운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에 젖은 자국이 생긴 게 무색하게 다시 눈물방울이 솟아난다. 울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처량했다.

 

  하늘색 머리칼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달리 찬란하게 빛이 났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 두 사람은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잡았고 쿠로코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카시를 불렀다. 평소와 달랐던 점은 왜? 하고 대답하며 마주한 얼굴이 어딘가 비장해보였다는 점이다.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응.”

  “아카시 군. 절 사랑하나요?”

  “쿠로코. 그건 전부터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

 

  쿠로코는 부쩍 사랑한다는 말을 졸랐다. 솔직히 말해, 아카시는 빈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마음에 비해 초라하고, 흔해빠졌고,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알았다면 얼마든지 귓가가 닳도록 속삭여줬겠지만 불행히 아카시는 훨씬 더 그럴듯한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이때까지 이런저런 말로 회피만 하던 아카시는 결국 쿠로코에게 솔직히 제 생각을 털어놓았더랬다. 빙빙 돌린 긴 설명에 처음에는 이해해주던 쿠로코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아카시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얼굴엔 점점 서운한 기색이 드리웠다.

 

  시무룩하게 쳐진 보고 있으면 쿠로코가 원하는데 뭔들 못해주랴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곤란한 날들이 늘어갔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려니 싶었다. 대답 없는 아카시에 잡고 있던 손을 휙 뺀 쿠로코만 아니었다면.

 

  “쿠로코……?”

  “됐습니다.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손은 왜 빼?”

  “잡기 싫어져서요.”

  “쿠로코.”

 

  잡기 싫다는 말에 불현 듯 불안감이 차오른 아카시가 뭐라도 말하려 쿠로코를 불렀지만 쿠로코는 냉랭했다. 저를 마주보지 않고 애꿎은 땅바닥만 노려보는 쿠로코의 눈이, 자신을 보기 싫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카시가 다급하게 다시 작은 손을 찾았다.

 

  그러나 뜨겁게 손등을 감싸는 아카시의 손과 달리 쿠로코는 손을 마주 잡지 않고 가볍게 주먹만 쥐었을 뿐이다.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정신이 아득해진 아카시가 얼른 허리를 낮춰 숙여진 쿠로코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마주했다. 쿠로코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쿠로코.”

  “…….”

  “쿠로코!”

 

  이러다 울겠다 싶어 아카시는 이제 쿠로코의 양팔을 붙잡았다. 힘 조절이 안 된 손이 팔뚝을 꽉 그러쥐었다. 그 악력에 반응이 없던 쿠로코가 아카시를 마주봐왔다. 불안해 흔들리는 눈동자에 울상이 된 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반응 하나에도 이렇게 애타하면서, 도대체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거야? 속상한 마음이 북받친 쿠로코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카시 군.”

  “응.”

  “저 불안해요.”

  “…… 뭐?”

  “불안하다고요.”

 

  참다 참다 진심을 내뱉는 목소리가 울음이 섞여 엉망이었다. 말로 하고 보니 지치고 외로운 마음이 더 사무치게 느껴졌다. 울면서 말하고 싶지 않은데, 떼쓰는 어린 아이처럼 입술이 멋대로 씰룩였다. 결국 시선을 떨군 쿠로코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급해진 아카시가 일그러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쿠로코를 바라본다.

 

  “왜, 말을, 흐, 안 해줍니까…….”

  “…… 천천히 얘기해도 돼.”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아카시에 쿠로코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쿠로코의 어깨가 달싹인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게 될 것 같아 쿠로코는 딸꾹질을 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처음엔, 괜찮다고, 끅, 생각했어요.”

  “…….”

  “아카시 군이, 말을 안 해줘도, 흐, 믿었으니까.”

  “쿠로코…….”

  “그치만……, 흡.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카시 군은 응, 하고 말았잖아요.”

 

  여간 서러운 게 아니었던지 쿠로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흐느끼다 못해 꺽꺽거리면서도 쿠로코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울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듦에도 아카시는 쿠로코가 말을 마칠 때까지 쿠로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쿠로코가 힘들게 전한 본심은 이랬다. 응, 하고 짧게 대답해주고는 저는 어떤지 얘기 해주지 않는 아카시가 서운했다고. 그냥 빈말이어도 나도 사랑한다고만 속삭여줘도 좋았을 것 같다고. 아카시가 저를 많이 좋아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거랑 별개로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시의 마음을 이해하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지다 이 상황에 지쳐버렸다고.

 

  울다 못해 기침까지 하는 쿠로코를 바라보는 아카시의 입이 썼다. 설마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항상 잘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쿠로코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자신보다 더 강하고 어른스러울 때도 있는 연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그냥 콱 죽고 싶어졌다. 무슨 고집을 피운다고 쿠로코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걸까.

 

  더 화가 나는 건 이 상황에서도 솔직하게 제 마음을 말할 수가 없는 자신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쿠로코의 등을 토닥여주던 아카시의 팔이 돌연 쿠로코를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일단 도망가지 못하게 품에 두고 있어야 진정을 할 것 같다. 불안함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갑자기 아카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쿠로코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눈을 깜박였다. 젖은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아카시 군……?”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고.”

  “으응.”

 

  아카시는 답지 않게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느라 애꿎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을 고르고 있는 표정을 올려다보며 쿠로코는 아카시의 가슴팍에 살며시 뺨을 기댔다. 쿵, 쿵. 정상보다 조금 빨리, 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박동이 아카시가 많이 놀랐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기분이었다. 굳건한 사람이 제 한 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구나. 쿠로코는 새삼스레 저를 향한 아카시의 마음을 다시 느꼈다.

 

  쿠로코가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카시는 알맞은 표현을 찾지 못해 초조한지 발끝을 탁탁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쿠로코를 끌어안은 팔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이 꽉 들어가 있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쿠로코의 입가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 아카시는 이런 사람이었다. 행동 하나, 몸짓 하나에 저를 사랑하고 있음이 묻어나오는.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매일 느끼고 있었는데. 괜히 들려주지 않는 그 말 한 마디에 서운함이 들어 투정을 부렸다. 익숙해지면 모른다더니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아카시는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좀 부끄러워진 쿠로코가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카시의 몸이 움찔거린다.

 

  “쿠로코?”

  “있잖아요.”

  “응.”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불안함과 걱정스러움이 가득하다. 다른 거 하나 없이 오롯이 저만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던 쿠로코가 발꿈치를 들어 아카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가볍고 간질간질하게 맞닿은 체온에 아카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쿠로코가 씩 웃었다.

 

  “뭐야……?”

  “앞으로 너무 마음이 벅찰 땐 입 맞추기로 해요.”

  “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다투는 시간은 아까우니 그 사이에 뽀뽀라도 합시다.”

 

  모든 걸 다 털어낸 쿠로코는 후련한 목소리였다. 쿠로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잠깐 얼이 빠져있던 아카시는 당당한 쿠로코의 표정에 웃기 시작했다.

 

  “좋은 방법이네. 나한테는 표현할 말을 안 찾는 게 더 이득 아니야?”

  “그건 아니고요. 찾을 때까지 이걸로 내가 참아주겠다는 말입니다.”

  “괜찮겠어? 뽀뽀에 정신 팔리느라 늦어져도?”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래요.”

  “그래, 그럼.”

 

  또랑또랑하게 제 주장을 말할 때는 언제고 얘기가 끝나자 민망해졌는지 쿠로코가 품에 얼굴을 숨겼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가 조금 붉었다. 아, 사랑스러워라.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크게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웃던 아카시는 그냥 참지 않고 목덜미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적나라한 소리에 분홍빛이던 피부가 확 붉게 변했다. 분명 얼굴도 예쁘게 물들었으리라. 아카시가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어 양손으로 느릿하게 쿠로코의 뺨을 감싸 얼굴을 들어올렸다.

 

  아, 역시.

 

  아카시의 눈에 들어온 건 제가 한 짓을 깨닫고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랑스런 연인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모양새에 입맛을 다신 아카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더니 두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저항 없이 작게 열린 입술 안으로 아카시의 혀가 들어가 숨어있는 작은 혀를 부드럽게 얽어낸다.

 

  정신없이 여린 입안을 가득 헤집던 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자 아쉬운 듯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의 작은 입술을 머금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사탕을 먹듯 연신 입술을 물고 빨던 아카시의 입술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떨어졌다. 호흡을 나눈 두 사람의 숨이 거칠었다. 쿠로코는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런 쿠로코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아카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쿠로코의 손 위에 다시 쪽, 쪽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로코가 후련한 것처럼 아카시는 아카시대로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라도 표현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제 애정을 올곧이 받으며 수줍어하는 애인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쿠로코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선물해준 것은 보습이 잘 되는 립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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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

[적흑] 발걸음

단편 2017. 6. 30. 00:41

  * 리퀘박스 요청 - 아이돌 AU


  [잠깐 작업실로 와.]

  [저 벌써 숙소 도착ㅎ]


  화면을 꾹꾹 누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쿠로코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끝맺기보다 그냥 휴대폰을 잠그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 불만을 내비쳐봤자 어차피 녹음실로 가게 될 자신이었다. 한숨을 폭 내쉰 쿠로코가 방금 침대에 던져뒀던 후드 집업을 집어 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은편 침대에서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던 아오미네가 한 쪽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어디 가?


  “작업실요.”

  “또 아카시냐?”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 대신 살풋 웃은 쿠로코가 소매에 팔을 꿴다. 다녀올게요. 아오미네가 손을 휘적거렸다. 인사를 뒤로한 채 쿠로코는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키세랑 미도리마는 방에서 자는 듯했고 무라사키바라만 부엌에서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쿠로칭, 어디 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응. 너무 늦게 오지는 말구.”

  “네.”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쿠로코가 현관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얼굴과 목덜미에 끼쳐들었다. 진짜, 녹음실이 가까워서 망정이지 아니면 그냥 안 갔을 겁니다. 속으로 투덜거린 쿠로코가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물기를 대충 손등으로 훔쳐내며 쿠로코는 생각했다. 왜, 항상, 리더는 이 밤중에 자기만 부르는지. 그리고 자기는 왜, 불릴 때마다 얌전히 향하는지.


  “왔어?”


  녹음실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생수병과 종이, 연필 나부랭이들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엎드린 아카시였다. 몸에 힘이 쭉 빠진 채 늘어져있는 모습에 쿠로코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아카시한테 다가간다. 딱 봐도 기운 없어 보이는 아카시가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을 내민다. 쿠로코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맡기자 약간은 마른 듯한 팔이 제 허리를 감싸왔다.

  아카시는 곡 작업을 할 때면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졌다. 보컬 레슨을 받을 때나 춤 연습을 할 때는 늘 가뿐하게 해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노래를 만들 때면 피부도 푸석해지고 엉망으로 마르곤 했다. 선천적으로 감성적인 사람이어서 안에 쌓인 건 많은데 쏟아내는 방법을 몰라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완성되는 곡은 매번 최고치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곤 해서, 팀원들은 아카시에게 곡 작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지만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이 쓰긴 썼다. 어느 새 배 부근에 얼굴을 푹 묻은 아카시의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쿠로코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잠은 좀 잤습니까?”

  “한 시간 정도.”

  “밥은요?”

  “… 아직.”


  이 사람이 정말. 훅, 하고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천장 한 번 쳐다보는 걸로 열을 식힌 쿠로코가 언제부터 굶었냐고 물었다.


  “어제…, 저녁인가?”

  “저기요.”


  겨우 식힌 화가 다시 스멀스멀 차오른다. 몸에 힘이 들어가 배가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는지 힘없이 피식 웃은 아카시가 웅얼거린다.


  “화내지마, 나 힘들어.”

  “화 안 나게 생겼습니까? 이러다 저번처럼 또 쓰러지려고 그러죠.”

  “안 그러려고 너 불렀잖아.”

  “제가 뭐 해주는 것도 없잖아요. 먹을 거 사오라고 시키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나 쉬게 만들어주는데?”

  “이렇게 쉬지 말고 차라리 숙소에 와서 좀 자고 가요.”

  “싫어. 조금만 더 있으면 멜로디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하여튼 고집은. 쿠로코는 아카시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똥고집인지라 아카시가 허리께의 옷을 부여잡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미안해. 뭐가요. 밤에 자꾸 불러내서. ….


  “쿠로코?”

  “불러내는 건 상관없는데요.”

  “밥 좀 챙겨먹고 잠도 좀 자고 하세요.”

  “테츠야도 바닐라 쉐이크로 때울 때도 많잖아.”

  “너는 그것도 안 먹잖아요.”

  “그건 그래.”


  아카시는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오선지로 시선을 옮겼다. 몇 마디 그려지기도 전에 좍좍 그어진 엑스표시가 화려했다. 쿠로코가 오선지를 만지작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아직 많이 모자라 보이는데 기한 안에 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다고. 다 만들 수 있어.”


  귀신같이 속마음을 알아챈 아카시가 품에서 고개를 떼어 시선을 마주해왔다. 얼굴은 까칠해도 눈에서는 열의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는 죽어나가더니 이제야 정말 감을 잡았나보다. 가만히 의지를 받아내던 쿠로코가 살며시 웃었다.


  “아카시 군 완벽주의는 말해봐야 입 아프죠.”

  “당연하지. 완벽하지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을 거야.”

  “그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네.”


  그럼 테츠야 연습량 더 늘려도 불만 없겠네. 말하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굳은 표정의 쿠로코한테서는 장난이라곤 1mg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카시 군. 저 지금도 연습 끝나면 화장실 달려가는 거 알잖아요. 그것만은… 하하. 농담이야.

  그럼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지지 않았지만 아카시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쿠로코한테서 완전히 몸을 뗐다.


  “숙소에 가서 잘 거야?”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저기 소파 베드에서 자고 있으면 안 돼? 몇 시간 안에 끝날 것 같은데.”

  “상관은 없는데 진짜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습니까?”

  “응. 네가 있으니까.”

  “…?”


  무슨 소리죠. 쿠로코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갸우뚱하는 모습이 귀여워 아카시가 웃으며 쿠로코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을 헝클었다.


  “넌 내 뮤즈잖아.”

  “엑.”


  쿠로코가 정색을 하며 능글능글한 얼굴의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진짠데.”

  “농담은 적당히 해주세요. 저 없어도 잘만 곡 만들면서.”

  “나 항상 곡 작업할 때는 너 불렀는데?”

  “… 으음.”


  사실인지라 부정하기 어려웠다. 부끄러워진 쿠로코가 휙 뒤돌아 소파베드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끝이 붉었다. 뒤에서 아카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 믿어주는 거야? 서운한데. 쿠로코는 대꾸하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아카시를 등지고 누웠다.


  “저 여기서 자고 있을 테니까 작업 마저 하세요.”

  “응.”


  아카시도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웃음을 머금은 채 의자를 빙글 돌려 바로 앉아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펜에서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쿠로코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다시 몸을 돌려 아카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종종 피아노로 음을 확인하는지 어느 샌가 헤드폰을 쓴 모습이었다.

  커다란 헤드폰 아래로 보이는 머리가 유독 작아보였고, 마른 어깨가 유독 수척하게 느껴졌다. 힘들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저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얹혀있는지 알았다. 아카시가 지칠 때 이런 식으로라도 위로가 된다면, 자신은 그게 언제가 됐든 아카시를 만나러 올 것이다. 아카시도 그걸 알아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자신은 아카시의 뮤즈가 맞을지도 몰랐다.

  생각하는 동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쿠로코가 속삭였다. 파이팅. 아카시 군.


  잠결에 무언가 몸을 강하게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뒤척이기가 영 갑갑해 미간을 찌푸리던 쿠로코가 가늘게 눈을 떴다. 창문 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여기… 작업실?’


  뜨이지 않는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의 팔이 쿠로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좀 더 자자…. 아직 새벽 다섯 시야….”

  “아카시 군…?”

  “응….”


  잠든 지 얼마 안 됐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아카시가 잠에 빠진 채 웅얼웅얼 대답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눈만 껌뻑껌뻑하던 쿠로코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기 전까지 널브러져 있던 오선지가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작업 다 했구나….’


  정말로 몇 시간 안에 작업을 끝냈다. 아카시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한껏 내려온 다크서클 마저 기특해 쿠로코가 부드럽게 눈 밑을 쓸었다. 아카시가 손에 얼굴을 비벼왔다. 나른한 고양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샌다.


  “자자니까 테츠야…. 자자. 코코 낸내.”


  품 안에서 움직이는 쿠로코가 거슬렸는지 아카시가 눈을 감은 채 쿠로코가 다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로 꽁꽁 고쳐 안았다. 따끈따끈한 체온과 포근한 체향이 훅 끼쳤다. 그러고 보니 아카시가 곡 작업을 다 끝난 아침은 항상 이랬다. 쿠로코는 아카시가 부를 때마다 오는 이유를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 순간을 또 맛보기 위해서, 자신은 그 밤중에 아카시를 만나러 걸음을 했나보다. 아카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쿠로코는 따뜻해져오는 마음 한 구석을 느끼며 자세를 편하게 잡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밝아져오는 햇살이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비쳐왔다.

  이 둘의 단잠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쿠로코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며 울부짖던 키세와 아오미네 때문에 다 깨졌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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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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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Be a Bad Boy!

단편 2017. 6. 29. 01:03

 * 쿠로코와 아카시 둘 다 엄청난 캐붕입니다. (아카시가 여전히 쿠로코를 테츠야로 부릅니다. 왜냐면 제가 좋아해서.)

  * 라스트 게임 스포 및 라스트 게임을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적흑이지만 아카시의 등장이 매우 적습니다. 아카시 사랑해 (...)

  * 그냥… 제가 좋아서 쓴 글이에요… 창피합니다… ( mm)


  얼마만이냐, 우리. 카가미는 주황색 포장지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이제 막 오랜만에 만난 마지바의 치즈버거와 해후를 시작한 참이었다. 종이를 벗겨내고 뽀얀 빵을 빛내고 있는 버거를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앞에서 진득한 시선 - 지금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그 버거가 넘어갑니까? - 이 느껴졌다. 정확히 13개의 버거 값을 지불한 사람, 쿠로코 테츠야가 바로 그 시선의 주인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민 상담 해주기로 했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걸 느끼며 카가미가 살그머니 버거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놈의 고민상담은 어째 일본 들어올 때마다 하냐! 카가미는 처음으로 쿠로코의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들어준 날을 떠올렸다.


  * * *


  “여, 카가미! 일본에 온 걸 축하해!”

  “이게 축하할 일이냐! 카가미,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예요!”

  “그 말버릇도 여전하네~”


  조용했던 공항이 카가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미국으로 전학 갔다 오랜만에 일본을 방문한 카가미를 반겨주기 위해 모인 세이린이 원인이었다. 몇 달 만에 만나는 건데도 여전한 모습에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던 카가미가 순간 드는 허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라, 그런데 쿠로코는… 요?”

  “저는 여기 있습니다.”

  “으악!”

  “뭐야, 카가미~ 오랜만에 만나서 다시 쿠로코 눈치 못 채는 상태로 돌아왔냐?”

  “아니거든!”

  “맞는 것 같은데요.”


  서운합니다, 카가미 군. 갈 때 그렇게나 눈물겨운 인사를 했는데. 쿠로코가 웅얼거리자 안 그래도 출국할 때 만들었던 흑역사가 민망해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쾅 박아 승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카가미가 다시금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만 소리 지르세요.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너…! 익!”


  다시 한 번 시선을 받는 건 싫은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힌 카가미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 쿠로코가 느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웃긴 웃었는데… 오랜만에 웃는 사람 마냥 입이 일그러지는 모양새가 어색해 카가미가 금방 진지한 얼굴을 해왔다.


  “쿠로코. 무슨 일 있어?”

  “….”


  평소였으면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할 텐데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침묵만 지키는 쿠로코가 이상했다. 선배들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들도 모른다는 듯 어깨만 들썩였다. 흠…. 잠깐 고민하던 카가미는 따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쿠로코의 손목을 잡아채 공항을 빠져나왔다.


  “카가미 군!”

  “쿠로코! 우리 오랜만에 마지바나 가자고!”


  손을 끌어당기는 무지막지한 힘에 쿠로코는 못 이기는 척 카가미의 뒤를 따랐다. 마지바에 들어서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햄버거 냄새가 풍겨왔다. 여전히 식성은 좋은지 카가미는 메뉴판을 읽듯 줄줄 버거를 주문했고, 쿠로코는 바닐라 셰이크 스몰 사이즈를 부탁했다. 쿠로코는 버거 안 먹어? 입맛이 없습니다. 흐응.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잖아.”

  “그렇네요.”


  이 대화를 끝으로 카가미는 산더미처럼 쌓인 버거를 들고 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포장지를 벗겨 곧장 버거를 입에 넣는 동안에도, 어느새 쟁반에 구겨진 포장지만 남았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쿠로코의 바닐라 셰이크 컵에서 빈 소리가 나고 나서야 턱을 괸 채 밖을 바라보고 있던 카가미가 쿠로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불러?”

  “네.”

  “진짜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셰이크만으로 배가 차는 거지?”

  “이때까지 봐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항상 신기하니까 그렇지.”

  “… 사람 끌어와 놓고, 실없는 소리만 하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잠깐잠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쿠로코는 가차 없었다. 당황한 카가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쿠로코를 말렸다. 잠깐, 앉아봐! …?


  “너 밥도 못 먹은 얼굴 하고 있기에 데려왔어. 안 그래도 말랐는데 피골이 상접할 것 같아서.”

  “그런 어려운 말도 압니까?”

  “야!"

  “농담입니다.”


  장난으로 얼버무렸지만 쿠로코는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가미의 상냥함에 지쳤던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다짜고짜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씀씀이도 고마웠다. 봐준다는 표정을 하며 자리에 앉은 쿠로코는 빈 바닐라 셰이크 컵을 만지작거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은….”

  “….”

  “아카시 군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을 얘기하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어? 아니…, 일, 일단 마저 얘기해봐.”


  쿠로코가 얘기한 내용은 이랬다. 재버워크 와의 경기 이후로 또 다른 자신이 사라져 외로워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아카시한테 매일 밤 연락이 온다는 둥, 잊을 만하면 도쿄로 와 다른 사람들은 안 만나고 자기만 만나고 간다는 둥. 게다가 더우니 몸조심하라며 이것저것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고. 그 과정에서 보이는 배려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곰살궂어 어느 아이돌의 노래 가사처럼 심쿵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것이다.


  “오늘 들고 온 이 미니 선풍기도 아카시 군이 보내준 겁니다.”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하늘색 미니 선풍기를 쿠로코가 들어보였다. 위에 토끼 귀가 달린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아카시 취향이 저런 거였나…. 카가미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문제는… 아카시 군이 너무 잘생겼다는 겁니다.”

  “풋-!!!”


  카가미는 쿠로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에 있던 콜라를 시원하게 뿜어버렸다. 쿠로코가 더럽다며 질색을 했다.


  “미, 미안.”

  “괜찮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해주세요.”


  쿠로코는 대충 물티슈로 콜라를 닦아낸 뒤 얘기를 이어갔다. 밤마다 전화통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섹시한지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지를 않나, 도쿄에 올 때마다 나날이 멋있어지고 있어서 시선을 둘 곳을 모르겠다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생길 수 있습니까? 또 다정하기는 어찌나 다정한지, 만날 때마다 신데렐라가 된 기분입니다. 카가미 군 신데렐라 알지요? 공주님이요. 아카시 군은 왕자님 같습니다. 진짜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는지 심장이 떨리다 못해 터질 지경입니다. 듣고 있습니까?


  “…카가미 군?”

  “듣고 있어.”

  “반응 좀 해주세요.”

  “어….”


  대충 카가미가 듣고 있음을 확인한 쿠로코는 카가미의 반응이 어떻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머리를 까도 잘생겼고 내려도 조각 같습니다. 머릿결은 또 얼마나 찰랑거리는데요. 비싼 옷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옷도 찰떡같이 잘 어울립니다. 이거 제가 반한 거겠지요? 친구한테 이런 감정을 갖게 되다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흥분한 듯 종알종알 말을 이어가던 쿠로코는 이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카시 군은 친구를 만나는데도 그렇게 멋지게 입고 오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쉽게 반해버리는 편일까요….”

  “음….”

  “아카시 군은 모두한테 그렇게 다정한가요?”


  이제는 누구한테 묻는 질문일지도 모를 중얼거림을 내뱉은 쿠로코는 애꿎은 빈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세상의 모든 심란함이란 심란함은 다 끌어 모은 얼굴을 하고 있는 쿠로코였지만 사실 그런 쿠로코를 보고 있는 카가미의 솔직한 대답은 NO, 였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아카시 자식,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키세만큼 인기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아카시를 따르는 팬들의 머릿수를 보면 일단 잘생긴 편이 맞았다. 다만 쿠로코가 그 외모를 알아봤다는 게 좀 의외였던 거지. 그리고 일단 아카시는 친구, 그러니까 쿠로코를 단순히 만나러 잊을만하면 도쿄로 올 사람이 아니다. 옷차림이야 어딜 가서든 우아하게 차려입을 놈이지만 쿠로코를 만나러 왔으니 오죽 신경 썼으랴.

  약간 의아한 건 쿠로코의 말을 들어봤을 때 대놓고 구애를 하지는 않고 천천히 접근한 듯 한데 생각보다 빨리 쿠로코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까놓고 말해 아카시가 쿠로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키세키 중에는 없었다. 당사자만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모두가 쿠로코를 좇는 진득한 시선을 느낀 터였다. 그렇게 둔한 쿠로코였는데 갑자기 어째서…? 차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가미가 물었다.


  “아카시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야?”

  “카가미 군, 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요.”

  “아.”

  “뭐… 먼저 대답하자면. 아카시 군이 잘생겼는데 다정하기까지 해서요.”

  “으응.”

  “말했잖아요. 신데렐라 된 기분이라고요.”

  “….”

  “사람이 그렇게 잘 챙겨주고 세심하고 다정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멘탈 잡으려고 앞을 똑바로 보면 그 잘생긴 얼굴이 저만 보고 있어요. 안 좋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응. 이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카가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쿠로코를 찾아 롯폰기로 뛰어갈 때 아카시가 “테츠야가 너무 예뻐서 내쉬가 반하면 곤란하니까.” 하고 말하던 게 생각이 났다. 카가미는 끼리끼리 만난다는 옛말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렇구나…, 날아간 영혼이 한 대답은 기운이 없었다. 반면 쿠로코의 눈은 빛이 나다 못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자, 이제 대답해주세요. 카가미 군.”

  “…뭘?”

  “아카시 군은 원래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행동하나요? 저 말고도?”


  어느새 일어나 몸을 카가미 앞까지 쭉 빼고 묻는 쿠로코의 표정은 기대감 반, 아니라고 했을 때의 실망감 반으로 우는 듯 웃는 듯 모호한 표정이었다. 이 일로 이렇게까지 절박한 쿠로코가 안타깝…기도 하고 여러 의미로 보기 힘들었던 카가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너 걔가 나한테 가위 들이밀었던 날을 벌써 잊었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참기로 했다. 쿠로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한테는 안 그래. 다른 애들한테도.”

  “정말입니까?”


  으음… 카가미는 5초 동안 전부 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대답이 없자 쿠로코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가미 군?”

  “까놓고 말해서 아카시도 너 좋아해.”

  “…?”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걸까….”


  뭐, 이미 말한 걸 어떡하겠어. 대충 그렇게 합리화 해버리는 카가미였다. 한편 쿠로코는 의외의 사실에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자기 자리에 앉은 쿠로코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아카시 군이… 절… 조, 좋아한다고요…? 응. 진짜…? 어. 다른 애들도 다 알아. 키세라든지, 아오미네라든지. 세이린 선배들도 …? 아마.

  쿠로코는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얼굴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파랗게 되었다, 붉어졌다 다시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카가미는 얌전히 쿠로코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쿠로코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쿠, 쿠로코?”


  그 박력에 깜짝 놀란 카가미가 말리기도 전 쿠로코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마지바 밖으로 뛰어나갔다. 카가미에게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금방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니 아마 아카시한테 하는 모양이었다. 짝사랑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전화를 하다니. 아카시가 저런 남자다움에 반해버렸나, 하고 생각하던 카가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 쿠로코.


  * * *


  그 이후로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원래의 색을 찾은 쿠로코의 얼굴로 봐서는 좋은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란히 카가미를 찾아온 두 사람은 덥지도 않은지 자석마냥 찰싹 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쿠로코가 불러서 나왔는데도 조카 커플의 데이트에 끼어 방해하는 삼촌의 기분을 느끼며 카가미가 조심스럽게 부른 이유를 물었다.


  “아, 테츠야한테 듣자니 네가 우리 둘 사이를 이어준 장본인이라고 해서 감사인사도 할 겸 보자고 했어.”

  “어어.”

  “그런데…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했다며?”


  아카시는 웃고 있었지만 아카시의 뒤로 날이 빛나는 가위가 보이는 듯해 카가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끄덕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이내 아카시가 뭐, 덕분에 테츠야의 귀여운 고백을 선물로 받긴 했지만. 하며 동공을 조이던 힘을 풀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 상태로 고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쿠로코는 뭐라고 그랬던가. 부끄러워요, 아카시 군. 하며 아카시의 품으로 파… 파고들었으며, 아카시는 이런 이런,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워. 우리 예쁜이. 따위의 말을 하고는 쿠로코를 끌어안았었지. 아, 내가 이걸 왜 상상하고 있는 거냐. 카가미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던 자신을 한 대 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여튼, 그래. 둘은 그렇게 알콩달콩한 연애를 시작했고 자신은 더 이상 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분명 그랬다. 그랬는데…


  “들어보세요, 카가미 군. 아카시 군이…”


  쿠로코는 카가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번의 고민 상담을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종종 스카이프로 사소한 하소연처럼 들리는 자랑을 들어줘서인지 쿠로코는 아예 카가미를 연애상담 - 을 빙자한 염장질 - 상대로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그게 자신을 편하게 고민도 나눌 만큼 친하고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증거라 고맙고 기뻤다.

  하지만 연애는 커녕 농구만 알고 해온 카가미에게 누구도 아닌 쿠로코의 입에서 나오는 둘만의 연애사가 너무 스윗해서, 카가미는 대체 뭐라고 답을 해줘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뭐, 이번에도 여느 때와 같이 가벼운 이야기겠지 싶어 마음을 편하게 먹은 카가미가 대충 쿠로코의 말을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아카시 군이랑 더 못 만나겠습니다!”


  그래그래. 아카시가 좋ㄷㅏㄱ…


  “뭐?!”

  “아카시 군이랑 더 못 만나겠다고요.”


  카가미 군 제 말 안 듣고 있었죠? 성질을 내며 마시고 있던 바닐라 셰이크를 쿵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는 쿠로코에 카가미가 어물어물 대답했다.


  “어, 너무 충격적이라 앞 얘기를 다 까먹었어. 그러니까… 왜, 왜 못 만나겠다고?”

  “아카시 군이 너무 저를 배려하기만 합니다!”

  “뭐?”

  “카가미 군. 아까부터 제 얘기 너무 안 듣는 거 아닙니까?”

  “네가 놀랄만한 얘기만 하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금방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쿠로코를 보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 언제는 그 상냥함이 좋다더니 갑자기 왜 이래? 그것보다…


  “너 그거 아카시한테는 아직 얘기 안 했지?”

  “벌써 했는데요.”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럽니까!”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기분에 쿠로코도 미간을 찌푸리며 카가미를 쳐다보았다. 카가미는 이 충격적인 소식에 매우 놀라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쿠로코를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충격적입니까?”

  “어! 매우! 너 아카시가 잘해줘서 좋다며! 공주님 된 기분이라며! 프린세스!”

  “그 때는 그랬죠!”

  “하?”

  “지금은 아닙니다.”


  불퉁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뭔가 일이 있었긴 있었나보다. 카가미가 얼른 이유를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아까 계속 말하고 있었다며 짜증을 낸 쿠로코가 이번엔 잘 들으라며 투덜거렸다.


  “솔직히… 저랑 아카시 군 사귄지 이제 100일이 넘어갑니다. 아직 방학은 하지 않았으니 계속 주말에만 만났어요. 아카시 군을 자주 만나기가 힘들다는 소립니다.”

  “그건 그렇지.”

  “저도 남자고 아카시 군도 남자인데 애인과 오랜만에 만나서 금방 헤어져야 할 때 아쉬운 거도 당연하잖아요.”

  “으응.”

  “그런데 아카시 군은! 보내주기 싫다, 하고 얼굴에 떡하니 쓰여 있는데도 ‘내일 학교 가야하니 이만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어, 테츠야.’ 같은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저녁 6시에 쌩하게 가버린단 말입니다!”

  “오, 방금 아카시랑 좀 비슷했어.”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노려보는,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은 쿠로코에 카가미가 깨갱하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연인끼리는 닮는다더니 화를 내는 그 서늘함이 꼭 닮아있었다. 카가미가 다시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자 심호흡으로 진정한 쿠로코가 말을 이었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6시가 뭡니까? 네? 저는 솔직히 학교 지각해도 되니 아카시 군이랑 오래 있고 싶습니다. 아카시 군이 학교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제가 교토로 가도 됩니다. 근데 그것마저도 아카시 군은 ‘네가 피곤하니까… 고생하지 마, 테츠야. 내가 그거 다 할게.’ 라면서 거절합니다.”


  으와아… 엄청 닭살. 카가미는 조심스레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코는 말하면서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았습니다. 다정하고, 내 몸 상태도 다 알아주고, 챙겨주고 예뻐해 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게 힘듭니다!”

  “아니, 대체 뭐가?”

  “저도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2차 성징 제대로 있는! 혈기 왕성한 남자라고요!”

  “하아아?”

  “아카시 군은 이걸 모르는 걸까요? 모르는 척 하는 걸까요? 솔직히 말해서 아카시 군도 가고 싶어 하는 기색 하나도 없으면서 저 배려한다고 일찍 가는 거 하나도 이해 안 갑니다! 아카시 군이 가지 말고 우리 좀 더 놀면 안 될까? 이 한마디만 해주면 저 집에 안 갈 수 있습니다. 요즘 늦게까지 하는 카페가 얼마나 많은데요? 거기서 손도 좀 더 잡고, 나란히 앉아있다 몰래 입맞춤도 좀 하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카가미 군?”

  “어, 어….”

  “카페가 아니라 룸카페면 더 좋습니다! 아카시 군이라면 24시간 하는 곳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죠! 아니면 그냥 둘이 손잡고 어디론가 도주해도 좋고! 하루 쯤 그렇게 단 둘이 늦은 밤까지 지내도 좋을 텐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만 이렇게 안달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말이죠!”

  “저기, 쿠, 쿠로코….”

  “그러다 모텔이든 호텔이든 저희 집이든 갈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왜 사람이 꼭 그 날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예? 그것도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로요? 저는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오히려 감질나서 진이 빠질 지경이에요! 연인다운 낮 데이트 이만큼 해봤으면 밤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야하는데 왜 거기까지 나가지를 못하냐고요!”


  분에 못 이긴 쿠로코가 테이블을 쾅쾅 쳤다. 안절부절 못하던 카가미가 진정하라며 쿠로코를 말렸다. 마지바의 모든 사람들이 룸카페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쿠로코와 카가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코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댔다. 카가미의 얼굴은 창피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아카시한테 그렇게 얘기했어?”

  “미쳤습니까? 부끄럽게 어떻게 말해요. 그냥 아카시 군이 너무 착해서 제가 힘이 드니까 만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헐…. 그렇게만?”

  “그럼 여기서 더 어떻게 얘기합니까?”

  “너무 돌려 얘기한 것 같아서.”

  “아카시 군은 이렇게 얘기해도 알아들을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해 카가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쪼로록, 조용해진 둘 사이에 쿠로코가 바닐라 셰이크를 마시는 소리만이 울렸다. 곱게 두 손을 모으고 쿠로코의 눈치를 보던 카가미가 우물우물 물었다.


  “쿠로코 너는 괜찮아?”

  “뭐가요?”

  “아카시 안 만나도.”

  “아카시 군이 이렇게 절 포기할 사람입니까? 다시 찾아오겠죠. 해답 찾으면 오라고 했습니다.”

  “아.”


  카가미는 그렇게 알아서 해결할 거면 왜 나까지 끼어들게 하는 거냐, 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다만 대신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미 다 식어버린 치즈버거를 주섬주섬 집어 들어 포장지를 벗겨냈다. 이거나 먹자…. 쿠로코도 별 말 않고 가만히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부아아앙-!


  “뭐야?”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나, 싶어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는데 거대한 엔진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와아앙, 와앙-! 하고 울리는 소리가 보통 쩌렁쩌렁한 게 아니라서 모두가 의아해하며 밖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끼이익-!

  딱 봐도 잘 빠진 라인과 웅장한 엔진 소리. 날렵하고 매끈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색 핫 바디의 바이크가 엄청난 마찰음을 내며 아슬아슬한 간격을 남기고 마지바 앞에 섰다. 그 과정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날쌔고 민첩해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어느 몇몇은 이미 밖으로 나가서 구경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개념 없이 시내에서 이렇게 난폭운전을 하는 건지 얼굴이나 보자 싶은 카가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쿠로코도 슬그머니 따라 나왔다.

  바이크는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웅, 웅 하는 소리를 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엄까지 느껴지는 겉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딱 봐도 값 좀 나갈 것 같았다는 거다. 이런 걸 누가 탔나 싶어 시선을 옮기는데 땅을 딛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갈색의 워커를 따라 올라가니 전체적인 키에 비해 길고 쭉 뻗은 다리와 무릎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찢어져 있는 블랙 데미지진 안으로 촘촘한 근육이 보였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다리인데, 싶은 카가미가 눈을 크게 뜨며 바이크의 주인을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가 새카만 헬멧을 벗었다.

  헬멧이 벗겨지자마자 보인 건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는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보다 더 영롱하게 빛나는 저 붉은 눈! 날렵한 콧날, 턱선까지! 카가미는 그것들의 주인을 아주 잘 알았다.


  “아, 아카시!”

  “여, 카가미. 오랜만이야.”

  “너…, 너!”


  기겁해 말을 잇지 못하는 카가미와 달리 아카시는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곤 바이크에 달린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아카시는 답지 않게 라이더 재킷에 가죽 장갑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아카시가 이렇게 입은 건 처음 보는데도 위화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카가미가 경악을 했다. 그럼에도 아카시는 느긋하게 멋을 부렸다. 흐음. 오늘 머리를 좀 올려봤는데. 어때, 괜찮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카가미는 여전히 똑같은 상태였다. 쯧. 아카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어디 가서 그런 얼빠진 표정 지으면 바보라는 소리 들어, 카가미.”

  “하?”

  “이미 바보인데요, 뭐.”

  “쿠로코!”

  “테츠야!”


  카가미 뒤에 숨어있던 쿠로코가 나와 아카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하려고 했다. 카가미의 어깨 때문에 아카시의 얼굴만 보였던 쿠로코는 그 때 제대로 아카시의 차림을 보았다. 세상에… 쿠로코의 눈이 카가미의 눈만큼 커졌다.

  딱 보기 좋게 마른 다리에 쫙 달라붙는 저 바지,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벨트, 허리와 반대로 떡하니 벌어진 어깨에 자로 잰 듯 딱 맞는 가죽 라이더 재킷. 움푹 파여 섹시하게 드러난 쇄골.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긴 이마를 훤히 드러낸 저 머리 스타일까지! 어떻게 저렇게 섹시할 수가 있나요! 쿠로코는 속으로 감격하고 말았다.

  한편 아카시는 아카시 나름대로 오랜만에 쿠로코를 만나 감격한 상태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카가미가 슬금슬금 물러났고 쿠로코가 느릿느릿 아카시한테 다가갔다. 쿠로코를 향해 아카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아카시 군…!”

  “오랜만에 봐도 귀엽고 사랑스럽네, 테츠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아…. 네가 그렇게 말을 하고 가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겠어.”

  “아카시 군….”


  아까보다 더 감격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쿠로코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아카시는 휙 소리가 나도록 쿠로코의 허리를 팔로 끌어안고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곤 쿠로코와 눈을 마주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쿠로코. 이제 네 마음 다 알았어.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을게. 오늘보다도 더 노력할 거야. 이제 착하기만 한 아카시 세이쥬로는 없어."

  “아카시 군…?”

  "세상에 둘도 없을, 너만의 나쁜 남자가 되어 보이겠어.”

  "흐, 아카시 군!"


  ...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인마… 카가미의 애타는 마음속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한 쿠로코가 껌뻑 넘어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아카시의 목을 세게 끌어안기까지 했다. 쟤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끌어안는 거야. 카가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 멀리서 여기 사람들 너네 구경하고 있는데! 하고 소리쳤지만 이미 둘만의 세계를 형성한 아카시와 쿠로코에겐 안타깝게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카시가 쿠로코를 끌어안은 채 버터 바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랑… 위험한 데이트 할까?”


  우엑. 카가미를 비롯,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저게 뭐냐며 전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아카시에게 또 한 번 반한 쿠로코는 찡긋, 윙크를 하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입을 맞췄다.


  “좋아요.”


  쿠로코가 아카시의 뒷자리에 휙 올라탔다. 아카시는 꿀이 떨어지는 눈빛을 하고는 네 안전이 제일이라며 쿠로코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부릉부릉, 요란하게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쿠로코의 팔이 아카시의 허리를 끌어안자마자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지바 앞을 떠나갔다. 쿠로코는 아카시 군, 달려요~ 따위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은 엄청난 소란이 휩쓸고 간 자리를 내려다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카가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측은함, 불쌍함, 동정심 등등이 담겨 있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는 카가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부끄럽고 황당한 마음을 담은 처절한 소리가 울렸다.


  “쿠로코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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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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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흑] 이불빨래

단편 2017. 5. 21. 23:55
  비눗방울은 사람이 보는 막 중 가장 얇은 막이랬던가. 아카시는 두둥실 파란 하늘로 떠오르는 투명한 구슬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을 받아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표면이 반짝거린다. 아예 쭈그리고 앉은 아카시는 끝이 벌어진 빨대를 비눗물에 퐁당 담갔다가 빼냈다. 그리곤 손으로 잡고 있던 멀쩡한 반대쪽을 입술에 댄 뒤 후, 불었다. 동그란 비눗방울이 빨대 끝에서 점점 커지다 떨어져 두둥실 떠오른다. 아까보다 훨씬 커다랗다. 꽤 재밌잖아, 이거? 해바라기처럼 벌어진 빨대 끝이 다시 비눗물에 담긴다. 참방.


  “아카시 군!”


  “… 후우-.”


  “지금 무시하는 거죠, 아카시 군?”

 

  “이거 봐, 쿠로코. 천천히 불면 더 커져.”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입니까? 저 좀 도와달라니까요!”


  “한 번만 더하고.”


  하아. 쿠로코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천하의 아카시가 비눗방울을, 그것도 그냥 빨대로 대충 만든 막대로 불면서 놀 거라는 걸. 아카시의 입술에 물린 빨대의 끝에서 다시 비눗방울이 퐁, 퐁 만들어진다. 반짝거려서 예쁘긴 하지만, 누구는 지금 땀까지 흘리며 이러고 있는데! 쿠로코는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를 훔켜잡고는 아카시를 째려보았다.


  “이제 됐죠? 빨리 오세요!”


  씩씩거리는 쿠로코에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있던 아카시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주섬주섬 걷어 올리고 맨발에 슬리퍼를 직직 끌며 걷는 모습이 천생 백수다. 하지만 얼굴은 잘생겼어. 내가 저 얼굴에 넘어갔지…. 천불나는 쿠로코의 속도 모르고 아카시가 투덜거린다.


  “나 이거 처음 해보는 거란 말이야.”


  “지금 하고 있는 거 다 하고 하면 되잖아요. 빨리 들어오세요.”


  “….”


  “… 아카시 군?”


  대답 없이 비눗방울이 머물던 하늘을 쳐다본 아카시는 씩 웃더니 쿠로코가 발을 담그고 있는 대야 바로 옆에 다시 쭈그려 앉는다. 퐁당. 빨대가 다시 비눗물에 잠수한다. 어이가 없어진 쿠로코는 할 말을 잃은 채 이 사람이 지금 뭐하나, 싶어 쳐다보고 있다. 아카시는 즐거운 듯 웃으며 유유자적 비눗방울을 불었다. 예쁜 비눗방울이 쿠로코의 눈앞을 지나간다.


  “….”


  “예쁘지?”


  “그 빨대 반으로 접어서 부러뜨리기 전에 어서 들어오세요.”


  “응.”


  뻔뻔한 아카시의 물음에 쿠로코는 이를 악문 채 웃으며 대답했다. 분노가 느껴지는 쿠로코의 발언에 아카시는 빨대를 얌전히 옆에 내려놓고는 쿠로코와 마찬가지로 물이 담긴 대야에 발을 담근다.


  “차가워.”


  “그러게 세탁기로 빨면 되지, 왜 이런 고생을 하자고 합니까?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로망이잖아. 햇볕 좋은 날, 마당에서 이불 빨래하는 거.”


  “어디 사는 누구의 로망입니까? 일단 저는 아닌데요.”


  “응, 애인이랑 같이 신혼 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로망.”


  “하여튼, 말이나 못하면….”


  닭살 돋는 말도 아카시가 하면 왜 이렇게 로맨틱한지. 날 세우던 예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다. 요즘은 어리광 부릴 때도 있다. 귀엽게시리. 쿠로코의 화는 눈 녹듯 녹고 어느새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거 이렇게 밟으면 돼?”


  “네, 그렇게요.”


  흐응. 고개를 끄덕인 아카시가 첨벙첨벙, 비눗물에 담긴 이불을 밟는다. 쿠로코도 같이 다리를 움직이는데 서로 엇박이라 그런지 휘청거린다. 게다가 비눗물 때문인지 발바닥이 자꾸 미끄러졌다.


  “미, 미끄럽네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이렇게 잡고 할까? 눈을 접어 웃은 아카시가 쿠로코의 어깨를 붙잡는 척 하다 목을 끌어안는다. 갑자기 훅 들어온 아카시의 얼굴에 쿠로코의 뺨이 발그레 물이 든다. 바지를 쥐고 있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쿠로코도 잡아줘.”


  “그러다 더 넘어집니다.”


  “안 넘어지면 되잖아. 잡아봐.”


  부끄러워 요리조리 시선을 피하는 쿠로코의 얼굴을 따라 움직이며 아카시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놓을 거니까요.”


  “응.”


  결국 또 진 쿠로코는 잠깐 쭈뼛거리다 아카시의 어깨 위를 붙잡았다. 키는 비슷한 두 사람인데 아카시 쪽이 훨씬 넓은 어깨를 가졌다. 농구를 할 때 이 어깨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히 기억하는 쿠로코는 조심스레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카시가 짓궂게 입술을 달싹인다.


  “듬직하지?”


  “…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그럼 말고.”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씩 웃는 얼굴이 짜증나 쿠로코가 아카시가 한 것처럼 목을 끌어안는다.


  “이러니 훨씬 듬직하네요.”


  “그치?”


  아카시는 동요 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할 말이 없어진 쿠로코는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하고 끝냅시다.”


  “응.”


  참방참방. 잔디밭 위로 내리쬐는 햇볕은 뜨거웠지만 발목 부근을 찰랑거리는 물은 시원했다. 이불을 잘근잘근 밟을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물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간지러워 쿠로코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도 물에서 균형을 잡는 게 여간 쉬운 게 아니어서 둘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거 꽤 힘드네.”


  “이만하면 됐지 않을까요? 꽤 오래 밟은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나갑시다.”


  약간 지친 쿠로코가 숨을 후, 뱉고는 팔을 내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근육이 뻐근했다. 어깨를 돌려보고 목을 이리저리 움직인 쿠로코가 긴장을 풀고 발에 힘을 줬을 때였다.


  “어?”


  “잠까…ㄴ!”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야에 담겨 있던 물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물방울들이 유리알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떨어진다. 방심했던 탓인지 발에 힘을 주자마자 그대로 미끄러져 균형을 잃은 모양이었다.


  “으….”


  엉덩이와 등허리가 축축해진 상태로 쿠로코가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안 넘어지려고 했는데 결과가 이거라니.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리던 와중 맞은편에 똑같은 자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카시가 보인다. 자기가 팔을 놓을 때도 여전히 쿠로코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아카시는 쿠로코가 넘어질 때 같이 넘어진 듯했다. 어벙벙한 표정으로 젖은 옷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카시가 웃겨 쿠로코가 대놓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풉, 아, 카시 군. 괜찮습니까?”


  “아아. 정말…. 옷까지 새로 빨게 생겼네.”


  젖어서 몸에 달라붙는 옷이 싫은 듯 아카시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러게요, 쿠로코도 동의하며 일어나 대야에서 빠져나온다. 옷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이불처럼 빨까요?”


  멍하니 대야를 내려다보던 쿠로코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아카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휘어진다. 붉은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흠, 하고 고민하는 척하던 아카시가 쿠로코의 귀에 속삭인다.


  “그럼 우리 속옷도 다 벗어야하는데?”


  “…!”


  “물론 난 좋아.”


  그제야 장소가 밖이 훤히 보이는 마당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쿠로코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카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


  민망해진 쿠로코가 아카시의 등을 퍽퍽 치고는 홱 돌아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취소입니다! 안에서 빨 거예요!”


  소리치는 쿠로코의 귀가 여전히 붉었다. 너무 웃어 눈물까지 맺힌 아카시가 서둘러 뒤를 쫓아간다.


  “쿠로코~ 화났어?”


  “몰라요!”


  “같이 가~”


  투닥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엉덩이가 데칼코마니처럼 동그랗게 젖어있었다. 몇 시간 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기울어진 신혼집 마당의 빨랫줄엔 하얀 이불, 트레이닝 바지 한 쌍, 티셔츠 한 쌍이 뽀송뽀송하게 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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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에 열릴 청흑 배포전 Ray of Shine ~신혼 2년차~의 [청4] 부스에서 판매될 책의 인포입니다.



<안식>

• B6 / 125p / 무선제본 / 11000원 / 전연령가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황태자 아오미네와 명문가 자제 쿠로코가 풋사랑을 하고 삽질하는 내용입니다.


※ 자초지종을 겪고 행복하게 결혼할 하권은 내년 1월 대운동회에 나올 예정입니다!


※ 행사날에는 오직 선입금 분량만 가져갑니다! ^0^)/ 선입금 및 통판은 26일까지 받습니다! 입금 기간이 짧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_ _)


Sample (1) : http://jennas2.tistory.com/20
Sample (2) : http://jennas2.tistory.com/21


※ 이 글을 바탕으로 다시 재편집을 해서 실제의 책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폼 : http://naver.me/54lgXb3i <<



의문점이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그리고 멋진 엽서는 흐엉님께서 그려주셨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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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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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흑] 여름비

단편 2016. 6. 26. 02:44

  * 테이코 시절의 아오미네 X 쿠로코

  * 계절 날조 (아마도...)

  * 아오미네 캐붕 주의




* 부디 BGM - 뚝뚝뚝 과 함께 즐겨주세요.



  비가 올 것 같다. 곧 장마가 시작할 거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뉴스가 문득 기억이 났다. 일어나자마자 코끝에서 나는 특유의 비 내음이 달갑지 않았다. 학교 째길 잘했나, 침대에서 까치집인 머리 그대로 멍하게 생각했다. 벌써부터 다리에 닿는 얇은 여름 이불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 해 다리를 휙휙 휘저었다.


 

  어느 새부터인가 훌쩍 짧아져 덮어도 발가락이 서늘한 이불이었다. 키가 컸다고 자랑하러 뛰어갔던 날,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웃으면서 쑥쑥 길어지는 다리가 부럽다고 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하얗고 말랑한 테츠 다리가 좋아.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등 뒤로 쑥 들어왔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네 속의 열등감의 키가 자랐던 건 아닐까.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까 싶다. 내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순 없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너랑 멀어질 줄도 몰랐다. 다 내 탓이었다. 요즘 연습에 나오질 않네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무룩한 건 잘도 알았으면서 이렇게 후회하는 걸 보니 나는 아호미네가 맞다.

 


  잘 웃지 않는 너였지만 그렇게 우울한 감정을 티내는 너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날 보는 테츠는 늘 조심스럽고 불안한 눈을 하고 있어서 괜히 더 심술이 났다. 테츠가 아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나에게. 그까짓 연습 손잡고 가주는 게 뭐가 어때서 버팅기고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다. 갔었다면 몇 번 공을 튕기다가 말아서 테츠를 더 슬프게 만들었을 거야. 아악. 아무것도 모르겠다. 와아악 헤집은 머리가 더 까치집이 됐다.

 


  생각하지 말자. 천장을 따라 의미 없이 시선을 움직이는데 벽에 붙여진 농구 선수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농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 더 강한 라이벌을 만나고, 깔끔하게 이겨버려서 반짝거리는 금빛 트로피를 거머쥘 줄 알았는데. 여긴 어디? 내 방 침대. 농구? 시시하고 재미없음. 나를 이기는 건 나뿐인데 매번 받을 트로피가 무슨 상관이야. 쳇. …… 농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에라이. 이상해진 마음에 반대편으로 홱 돌아누웠더니 책상에 놓인 다른 선수의 피규어가 보인다. 정면으로 보이는 피규어 신발 밑창을 보고 있자니 테츠가 농구화 밑창이 다 닳아서 새로 구매해야 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저 선수의 이름을 땄다고 그랬나? 같이 사러 가지 않겠습니까, 묻기에 냉큼 좋다고 대답했는데 약속했던 날에 비가 와서 못 갔었지. 다 사고 마지바에라도 갈까 했는데 아쉽네요. 응, 그러게. 둘 다 미련이 그득그득 담긴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아, 나 또 테츠생각 하잖아.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로 누웠더니 아까는 몰랐는데 천장 벽지 무늬마저 농구공이다. 여기도 농구, 저기도 농구. 농구 생각 아니면 테츠 생각. 저기요, 아호미네 다이키 머릿속의 뇌 님? 다른 건 생각 못합니까? 일 좀 해라, 이 새끼야…. 짜증나는 마음에 침대 위에서 마구 버둥거렸더니 매트릭스가 방방 울린다. 나 뭐하는 거냐…. 엎드린 자세로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습도가 높아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다.

 


  그대로 습한 숨을 내뱉고 있자니 배가 고파져서 벌떡 일어났다. 원래 기분 꿀꿀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최고다. 사실 제일 좋은 건 마이쨩 누나지만 지금은 아침 - 아니 점심 - 이니까 고이 접어뒀다. 비척비척 밖으로 나왔더니 아무도 없어서 집이 조용했다. 부엌으로 가봤더니 그래도 아들이랍시고 챙겨주는 엄마의 메모가 보인다.

 


  [냄비에 육개장 있으니까 데워먹어.]

 


  오, 나이스. 신난 마음에 얼른 냄비 뚜껑을 열었더니 보이는 건 냄비에 딱 맞게 들어가 있는 다름아닌 육개장 컵라면. 엄마…. 아들을 이기는 건 아들이 아니라 엄마였나봐…. 먹지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배고픔에 아우성을 내는 위장의 강력한 저항에 이기지 못하고 육개장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허탈한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뚜껑을 뜯는데 힘조절에 실패했는지 뚜껑이 조금 찢어졌다. 쯧, 대충 물을 붓고 접시로 덮어두면 되니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오늘따라 찢어진 부분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괜히 만지작거리며 찢어진 티가 안 나게 손가락으로 붙여보는데도 티가 난다.



  절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뚜껑을 보고 있자니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또 테츠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매만져도 붙지 않는 뚜껑이 꼭 멀어져버린 자신과 테츠의 미래 같아서 입이 썼다.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웃겨서 아오미네는 덜 익은 육개장을 와작와작 삼키듯이 씹어 먹었다.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먹어 텅 빈 육개장 그릇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니 빗소리가 들린다. 눈 떴을 때부터 그렇게 물냄새가 나더라니 결국 비가 쏟아진다. 아까 센치해졌던 것도 다 비가 올 날씨여서 그랬나보다. 애초에 날씨에 좌우되는 자신도 아니었지만 한창 예민할 나이이니만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창밖을 보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죽죽 내린다. 테츠는 우산 챙겼을까. 맨날 늦잠 자고 머리 정리한다고 우산 챙기는 거 잘 깜빡하는데.

 


  몇 십분 전에 일어나 이리저리 뒤집힌 머리를 하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사실 테츠는 우산이 없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그대로 비를 맞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비 맞으며 하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면서. 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그것도 그렇다 싶어서 충동적으로 손을 낚아채 빗속으로 뛰어든 적이 있다. 후끈한 공기에 미지근해진 비가 온몸에 쏟아져 내려 금방 다 젖어버리고 말았지만 식어버리는 체온 속에서 맞닿은 손바닥으로 느껴졌던 뜨뜻한 온기가 아직도 저릿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당시엔 드라마라도 찍냐,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회상하니 드라마만큼이나 눈부신 추억이었다. 다음날 테츠가 감기에 걸려 나타난 건 유감이었지만. 그 이후로 둘 다 우산을 깜박한 날에는 무조건 내 재킷이나 셔츠를 뒤집어쓰고 가까운 마지바까지 달려가곤 했다.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이 좁은 셔츠 아래에서 테츠 어깨를 끌어안았을 때의 감촉은 마치 테츠와 나 둘만 남겨진 세상처럼 아득해서 한 손에 들어오는 어깨를 더 세게 붙잡을 때도 있었다.

 


  아, 생각하고 있자니 테츠가 보고 싶다. 흘깃 시계를 보니 벌써 학교가 끝날 시간이었다. 어지간히 늦게도 일어났다. 아마 연습도 흐지부지돼서 미도리마 말고는 거의 다 빠질 테니 지금 힘껏 달려가 운이 좋다면 테츠랑 마주칠지도 몰랐다. 아니, 만날 게 분명하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며칠 만에 만나 얼마나 어색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었지만 그것보다도 테츠를 만나고 싶었다. 가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한 아오미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라면 국물이 튄 옷을 벗고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현관으로 뛰어갔다. 아, 그 전에 머리에 대충 물칠하고 양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함빡 젖은 수국 꽃잎에서 빗방울이 습하게 묻어나온다. 장마라 그런지 공기가 눅눅하고 무겁게 달라붙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렇게나 안 움직이던 다리가 결심하고 나니 이렇게 쉽게 움직였다. 탁탁탁탁, 달리는 발밑에서 튀어 올라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는 빗방울이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선사한다. 가슴께에서는 뜀박질만큼이나 세찬 박동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활기를 내뿜는 몸이 낯설고, 반가웠다. 나중은 어떻게 돼도 좋아. 일단 테츠한테 가는 거로도 충분해.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이 코너만 돌면.

 


  “헉, 헉. 테츠…!”

 


  거 봐. 내가 뭐랬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비로 뿌연 시야 사이로 막 교문을 빠져나온 작은 몸이 보인다. 가빠진 숨소리와 귀를 울리는 빗소리,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눈앞의 테츠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축 쳐진 안쓰러운 어깨가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이 안아줄 테니까.

 


  “집에 같이 가자-!”

 


  “아오, 미네, 군….”

 


  “마지바도 가자! 내가 바닐라 쉐이크 사줄게!”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테츠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싫어졌나? 힘차게 들었던 손을 엉거주춤하게 내리자 훅 밀려드는 서운하고 멋쩍음에 먼 산을 보며 볼을 긁적거리는 찰나,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테츠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뛰어와 답싹 허리를 끌어안았다. 허리로 전해지는 작은 떨림과 갑작스런 열기에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테츠를 끌어안았다.

 


  “미안. 보고 싶어서 왔어.”

 


  “….”

 

 

  “테츠?”

 


  “… 제일 큰 사이즈로 안 사주면, 화낼 겁니다. 바닐라 쉐이크.”

 


  나는 대답 대신 손에 꼭 쥐고 왔던 셔츠를 테츠 머리 위로 둘러주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드라마의 또 다른 한 장면을 찍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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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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