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 아카시 세이쥬로 x 비서 쿠로코 테츠야

* 약간의 캐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리 주의.

 

  - 잠시 내 방으로 올라와, 테츠야.

 

  - 알겠습니다.

 

  하아. 쿠로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옷차림을 정리했다. 직속 상사인 아카시로부터의 호출이었다. 방금까지 경쟁 회사와의 미팅을 하느라 종일 같이 붙어있어 놓고도 숨 돌릴 틈 없이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근 후 바로 다시 호출이 왔을 땐 -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쿠로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미팅에 나가기 전까지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쿠로코는 아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며 사장실로 향했다.

 

  쿠로코의 상사이자 쿠로코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사장인 아카시는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남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스펙. 능력. 아카시의 회사가 국내에서 손꼽을 만큼 대기업이 된 이유는 아카시가 실수 하나 없이 모든 프로젝트를 대성공 시켰기 때문이다. 아카시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면 실패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직원들을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겸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카시 사장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존경하면서도 경이로운 능력에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일처리를 위한 탓에 아카시는 늘 생각이 많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날이 서다 못해 사람을 들들 볶는 아카시를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들어했고 어느 순간부터 아카시의 일정 반경 내에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요 몇 개월 간 아카시 옆에 붙어있는 사람이 생겼다. 새로 비서로 들어온 쿠로코 테츠야가 바로 그 사람이다. 쿠로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시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다. 사람들은 쿠로코를 신기해하며 쑥덕댔다. 쿠로코가 아카시를 좋아한다, 부터 사실은 쿠로코가 아카시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 등등의 시덥잖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쿠로코가 아카시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기분이 들쑥날쑥한 아카시가 심술을 부리는 사춘기의 십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절반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의 중학생도 안 할 짓을 하곤 하니까. 서류 순서 바꾸기라던지, 볼펜의 뚜껑 색을 바꿔놓는다던지. 아주 사소한 장난들. 아, 남들과 조오금 다른 점이 있다면 쿠로코는 아카시의 심술을 그러던지 말던지, 하고 흘려 넘길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 * *

 

  “어이, 아카시! 너, 당장 그 지랄 좀 그만두라 것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카시의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카시는 책상에 앉아 여유롭게 장기를 두다 말고 한 손을 들어보였다.

 

  “여어-, 신타로.”

 

  “여어-. 가 아니라는 거다, 여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네 비서들은 이 모양이냐는 거다!”

 

  아카시의 오랜 친구 겸 인사팀장인 미도리마 신타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카시의 책상에 소리 나게 무언가를 탁 놓았다. 아카시가 느릿하게 집어 들자 눈에 보이는 글자는 ‘사직서’.

 

  “네 비서가 또!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제발 비서 좀 그만 볶으라는 것이야. 벌써 5명이 넘어가고 있다는 거다.”

 

  아카시가 어깨를 들썩였다.

 

  “난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소한 일들을 못 버틴다는 건 그들 스스로가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 아닌가?”

 

  “그 사소함이 하루, 아니 매일 반복되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카시, 너잖아!”

 

  나는 잘못이 없는데, 하하.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해 끼치지 않아요~ 웃음을 짓고 있는 아카시를 보던 미도리마가 결국 폭발했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네 비서는 네가 알아서 뽑던지 말던지 해!”

 

  씩씩거리다 못해 얼굴까지 붉게 물들인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책상 위로 족히 수십 장은 돼 보이는 이력서를 팽개치고는 쿵쾅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아카시는 쯧,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리곤 이력서들을 집어들었다. 두께가 상당했다.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군. 자기가 생각해도 욱하는 성격 탓에 전담 비서 자리가 하루가 멀다시피 공석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아카시의 눈가가 슬며시 찌푸려졌다. 물론 전담 비서는 자신의 가장 최측근으로서 누구보다도 오래, 꾸준히 옆에서 업무를 도와줘야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익숙해질 만하면 자기 때문에 그만두니까 화날... 수도 있겠지. 음. 아카시는 미간의 힘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시는 전담 비서가 그만둠으로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피로가 쌓여 신경이 예민해지다 보니 신타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닦달하고 괴롭게 만든다는 점에 있었다. 참지 못한 직원들의 우는 소리가 회사 홈페이지의 신문고나 직원의 소리함에 가득 찼다. 양심의 가책을 아-주 조금 느낀 아카시가 그럼 새 비서를 다시 뽑으라고 전했는데 그 말들 들은 신타로가 위와 같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가버린 것이다. 아카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이력서 뭉치를 대충 휘리릭 넘겨보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멈췄다.

 

  이름 쿠로코 테츠야

 

  나이 25세

 

  ...

 

  특이사항은 유치원 보육교사 경력...?

 

  흐응. 유치원이라... 아카시도 가끔, 아주 가끔은 직원들을 긁는 자신의 모습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유치원 교사가 오면 적당히 잘 달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아카시는 곧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경험으로 고스펙의 사람을 뽑든 저스펙의 사람을 뽑든 차피 금방 떨어져나갈 걸 알고 있었으니 새로운 실험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력서에 붙어있는 사진에 있는 유치원 선생의 말간 눈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귀찮은 일을 던져주고 간 미도리마에게 리벤지하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 삑. 나야, 신타로. 골랐어.

 

  - ... 너무 빠른데. 하지만 너의 보는 눈은 정확하니 일단 바로 면접을 보도록 하지.

 

  - 아아. 아주 적합한 인재일 거야.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아카시의 눈동자가 빛났다.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도리마는 이력서를 보다 말고 눈을 의심했다. 눈앞의 남자 - 라기 보다는 소년 - 의 볼만한 것이라고는 유치원 교사 경력뿐이었다. 공인 영어 점수도 평균, 제 2 외국어 칸은 아예 비어있고, 게다가 전공까지 상경계열이 아닌 유아교육과. 그렇다고 외모가 그리 출중한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떤 부분에서 아카시의 눈에 띈 거지? 애초에 우리 회사에 지원할만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하며 미도리마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고는 다시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쿠로코는 반듯하게 앉아 무표정으로 미도리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흐르지도 않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 같은 기분에 미도리마가 황급히 질문을 했다.

 

  “쿠로코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유치원 말고 회사에서의 경력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너무나도 빠르고 간결하게 나온 대답에 미도리마의 말문이 막혔다. 몇 초간의 정적이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미도리마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때까지 해왔던 일과 많이 다를텐데 버틸 수 있겠습니까. 유치원 일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의 수배는 힘들텐데.”

 

  “괜찮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

 

  일말의 변화도 없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코에 미도리마는 그만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곧 그만 둘 게 뻔한데 이름뿐인 면접은 봐서 뭐하랴. 다음번에는 면접도 그냥 아카시한테 떠넘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도리마가 쿠로코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쿠로코가 서명을 하는 동안 아주 소박한 소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아이들을 대할 때 필요한 인내심이 쿠로코에게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내장되어 있어서 아카시를 오랫동안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혹시나 모르지 않는가. 7살을 견뎌내는 참을성이 저 중2병 환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줄지.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아 쿠로코를 응원했다.

 

  ~ 2015, 쿠로코의 좌충우돌 비서 생활기~ 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쿠로코는 눈앞의 굳건하게 닫힌 사장실 문을 바라보다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또 어떤 방법으로 들들 볶일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대충 대꾸해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쿠로코가 노크를 했다.

 

  “사장님, 쿠로코입니다.”

 

  “나는 테츠야를 불렀는데.”

 

  ... 이 자식이. 돼도 않는 꼬투리에 살짝 울컥했으나 심호흡으로 참아낸 쿠로코가 다시 노크를 했다.

 

  “... 테츠야입니다. 쿠로코 테츠야요.”

 

  “들어와.”

 

  끼익, 거대한 문이 뻑뻑하게 열리고 드넒은 사장실 안에는 아카시가 책상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채 손등으로 턱을 받치고 앉아있었다.

 

  “어서 와, 쿠로코.”

 

  “네, 사장님.”

 

  아까는 테츠야라더니 이번엔 쿠로코라고 부르는 아카시에 쿠로코는 지금 아카시의 감정상태가 꽤나 오락가락임을 눈치 챘다. 호출할 때의 목소리가 낮아서 기분이 저조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의외로 아카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보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평소와는 달리 느슨하게 풀려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쿠로코는 뭐가 아카시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인터넷 기사를 몇 개 봤는데 말이지.”

 

  “네.”

 

  “스킨십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대.”

 

  “... 네?”

 

  “스킨십을 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순환을 감소시키고 고통을 완화하는 엔도르핀의 생성을 자극해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더군.”

 

  “그런데요?”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쿠로코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심술궂은 비아냥을 하면 그냥 네, 네 하고 달래면서 넘어가면 되는데 이렇게 나온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쿠로코가 이리저리 눈동자만을 굴리고 있자 아카시가 씩 웃었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스킨십이, 나한테도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네?”

 

  “내가 이 회사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받았지 덜 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안 그래?”

 

  “그건 맞지만...”

 

  “이런 내가 스킨십을 통해 받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봐. 내 정신 건강이 좋아지겠지?  여유가 생긴 나는 너그러울 거야. 그럼 모두의 스트레스도 줄어들 테니 결국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 회사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거지.”

 

  “그것도 맞긴 한데...”

 

  일단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니 부정은 않는데 저 말을 꺼낸 의도가 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쿠로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시가 쿡 웃었다.

 

  “지금 테츠야의 얼굴 굉장히 바보 같아.”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다니 테츠야도 좀 혼란스럽긴 할 거야.  이해해.”

 

  평범한 두뇌라는 게 그렇지 뭐, 따위의 말을 뱉으며 생긋 웃는 아카시에 쿠로코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쿠로코였다가 테츠야였다가 다시 쿠로코였다가 테츠야가 된 호칭같은 건 이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본론이 뭔가요. 표정보다도 더 영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회사의 발전을 위해 스킨십으로 내 스트레스를 줄이자 이 말이야.”

 

  “아... 하하, 그것 참 좋은 방법이네요.”

 

  는 무슨!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다짐한 쿠로코가 아카시의 다음 말이 끝나면 바로 파이팅입니다, 하고 말해야겠습니다, 생각하는 찰나 아카시가 그 어떤 누구보다도 해사하게 웃으며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렇지? 자, 이리 와, 테츠야.”

 

  “?!”

 

  “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도무지 가지 않는 쿠로코가 경악했다.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고 아카시만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아카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쿠로코는 충격이 컸는지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있었다. 아카시는 얼마 없는 인내심을 십분 발휘 해 팔을 벌린 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쿠로코는 여전히 그 표정 그대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그렇게까지 설명해줬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생각보다 둔하구나, 테츠야는.”

 

  아카시가 눈을 내리깔며 슬며시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부석이 된 쿠로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쿠로코를 꽉 끌어안았다. 쿠로코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질리도록 봤던 아카시의 디올 정장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보라색 넥타이와, 형광등에도 반짝이는 루비가 박힌 넥타이핀. 안기는 그 순간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아카시의 코롱 냄새.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아카시의 팔. 그리고 당장 이마가 닿은 아카시의 가슴 근육. 아카시의. 아카시의. 아카시의.

 

  인간의 오감 중 세 가지 감각이 모두 아카시에게 잠식되고 나서야 쿠로코는 자신이 아카시의 품에 빈틈없이 가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쿠로코가 뒤늦게 밀어내려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아카시는 더 세게 끌어안을 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무슨...!”

 

  얼굴이 붉어진 쿠로코가 막혔던 숨을 토해내 듯 입을 열자 아카시가 한쪽 팔로 쿠로코의 머리를 감싸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후, 귀에 낮은 숨을 불어넣으니 쿠로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신선한 반응에 아카시가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잦아들고, 아카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쿠로코의 청각을 점령했다.

 

  “어디 한 번 스트레스를 줄여보자고, 내 비서님.”

 

  그 순간 쿠로코는 온몸으로 직감했다. 앞으로 이 예측 못 할 사장이 자신의 감각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지배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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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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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흑] 안식 (2)

단편 2015. 10. 21. 23:19




*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황제의 관을 쓰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너무 푸르러 검은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사각형의 관. 그 끝에 드리워진, 아오미네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열두 가지 색의 옥구슬들. 건장하고 단단한 어깨 위에 꼭 맞게 걸쳐진 푸른빛의 구장복. 신이 내린 황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그 앞에서 한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아오미네를 보며 쿠로코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반드시,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고.

 

   태평성대를 물려주신 선황폐하 덕에 아오미네도 역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쿠로코는 곁에 있겠다는 일념 하나로 등용을 위해 공부했다. 그 결과, 대사간을 보좌해 원내 사무를 지휘하고 간쟁과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사간으로 아오미네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롯이 혼자 노력해 얻어낸 성과였다. 아오미네는 기특하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쿠로코도 기쁘게 마주 웃었다.

 

   아오미네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신하가 되었다지만 둘의 관계에 크나큰 변화는 없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들 몰래 주고받는 서로만의 눈인사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찔하지만 달콤했다. 자신의 입장 상 쓴 소리를 하러 무거운 마음을 지고 편전에 들렀다가도 괜찮다, 너그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사르르 녹아내리기도 했다. 보고가 끝나고 살포시 입 맞추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마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는 그대도 웃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그러나.”

 

   “… 말을 꺼낸 제가 잘못입니다.”

 

   “알았으면 그냥 받도록 해. 나는 더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폐하께서는 자제하는 법을 좀 배우셔야겠습니다.”

 

   쿠로코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오미네도 즐거운 듯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다음 안건은 …. , 웃으며 상소문을 넘기던 쿠로코가 멈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묘한 차이를 눈치 챈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손에서 홱, 상소문을 빼앗았다. 쿠로코가 달라는 듯 양손을 내밀었지만 아오미네는 그저 재빠르게 상소를 읽을 뿐이었다. 쿠로코는 낭패라는 듯 어두워진 얼굴로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었다. 아오미네가 상소문을 다 읽자마자 탁자에 거칠게 팽개쳤다.

 

   “쯧…! 내 그리 일렀건만!”

 

   “폐하….”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내일 조회 때 내 직접 이 안건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너…!”

 

   “… 다음 후대을 위해서라도, 후궁을 들이는 일은 중요합니다, 폐하. 황후마마 책봉은 더더욱요.”

 

   머뭇거리던 쿠로코가 입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아오미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손도 보셔야지요…. 폐하를 닮은 멋진 왕자님 말입니다.”

 

   아오미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쿠로코가 차마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순간 아오미네가 거칠게 쿠로코의 팔을 잡아채고는 반대 손으로 턱을 붙잡아 저를 보게끔 고개를 들게 했다.

 

   “진심으로 이르는 것이냐.”

 

   “… 진심입니다.”

 

   “하…!”

 

   “… 폐하.”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진심이다? 그대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

 

   쿠로코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자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대가 슬퍼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후궁도, 황후도 들이지 않아. 내겐 테츠, 너밖에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하지만…!”

 

  후사는 어쩌실려고 그럽니까, 뒤에서 도는 소문은요.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얼굴을 놓고 돌아서버리는 아오미네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만 돌아가거라. 지금은 그대 얼굴 보고 싶지 않느니.”

 

   단호히 말하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입을 꾹 다문 채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요동치는 감정과는 달리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예뻐서 쿠로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입조심을 하니 아오미네는 몰랐지만 노출되어있는 쿠로코는 알고 있었다. 궁 안의 사람들이 자신과 아오미네 사이를 의심하며 뒤에서 수군대고 있다는 걸.

 

   소문을 들은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유난히 기척이 약한 탓에 사람들은 쿠로코가 바로 옆까지 다가오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 때도 평소처럼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면 될 걸, 귀에 박히는 폐하라는 단어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남색을 밝히신다더라, 사간이 정무 보고를 끝내고 나면 침전으로 데려가 물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밀애를 즐긴다더라. 그리고 비역질까지… 쑥덕쑥덕.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쿠로코의 가슴을 후려쳤다. 놀란 가슴 추스리지도 못한 채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다. 집으로 와서도 쿵쾅이는 심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댄 쿠로코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금세 눈물이 차올라 아른아른한 시야에 즉위식의 늠름한 아오미네가 아른거렸다.

 

   내 저 분을 성군으로 만들겠다, 다짐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쿠로코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그 분의 인생에 있어 큰 오점으로 남는다는 그 사실이 쿠로코를 힘겹게 만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웃어주시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선명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알지 못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두근거리는 심장은 현실을 부정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마음을 쏟은 사람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 쿠로코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후로부터 아오미네와 정무 외에는 만나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원인을 캐묻는 아오미네에게 아무 일도 없다, 그저 바쁠 뿐이라고 대답할 때면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꾹 참고 덤덤한 척, 괜찮은 척한 척 회의에 참석할 때면 후궁과 황후를 원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매일 빗발쳤다. 방금처럼 아오미네가 노여움을 터뜨린 이유였다. 내일 아침 정무에서 제발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가길. 이 와중에도 후궁을 들이겠다는 말만은 않길 바라는 자신이 한심해 쿠로코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날이 밝고, 쿠로코가 다시 한 번 관복을 정갈하게 정리한 후 정전에 들자 그 사이 소문이 불어났는지 꽂히는 시선이 더 따가웠다. 복도를 지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사람들은 쳐다보다 이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쿠로코는 덤덤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황제폐하 납시오-!”

 

   정전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아오미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제 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도 붉은 용포가 참으로도 잘 어울리구나, 하고 생각했다. 금색 실로 날아오르는 두 마리의 용이 수놓아진 붉고 화려한 용포는 아오미네의 기품 넘치는 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저 용포를 벗게 만들 일이 없길. 쿠로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오미네가 회의를 시작을 알렸다.

 

   백성들의 세금 문제, 소작료 비율 등의 문제가 오가고 아오미네는 언제나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회의가 끝나가고,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쿠로코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찰나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내 후사에 대해 걱정이 많다 들었소.”

 

   올 게 왔구나. 쿠로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짐은 후궁도, 황후도 들일 생각이 없소. 그러니 이제 상소를 올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신하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폐하, 다음 왕위를 위해서라도 후사를 보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전체적으로 전국에 방을 붙여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의 연을 엮고 싶소.”

 

   “폐하,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나라 일은 그대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도 이것만은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삼삼오오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하, 백성들이 민심이 안정되니 나라의 어머니인 황후마마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후사를 보셔야 왕위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사옵니다.”

 

   폐하! 폐하!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불러대는 소리에 아오미네가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쿠로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오미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소!”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오미네가 날카롭게 신하들을 훑어보았다.

 

   “짐은 더 얘기할 게 없소이다. 그만들 하고 물러나게. 이 이상 얘기하면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경고하는 아오미네의 눈빛이 매서워 신하들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쭈물 전부 눈치만 보던 와중, 처음 운을 떼었던 신하가 흘깃 쿠로코를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궁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알고 계시옵니까.”

 

   “소문?”

 

   “폐하께서 최근 남색을 즐기신다는 소문 말이옵니다.”

 

   쿠로코가 몸을 움찔거렸다.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아오미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내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다 말고 사간원의 아이랑 비역질을 하신다더라, 뒷얘기가 많사옵니다.”

 

   “… 그대가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군.”

 

   “다 늙어가는 마당에 폐하를 바른 길로 이끌 수만 있다면 소인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용안 앞에서 이를 줄 몰랐기에 다들 경악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가 말을 이었다.

   

  “황후가 싫으시다면 후궁이라도 들여서 후사를 보셔야하옵니다. 폐하께서 제대로 후사를 보신다면 남색을 즐기던, 남창을 부르던 다 문제없을 아니옵ㄴ….”

 

   “이…! 당장 저 자를 쫓아내거라!”

 

   “폐하!”

 

   “뭣들 하지 않느냐! 끌어내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남창이라는 말에 아오미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노성을 터뜨렸다. 죄인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던 쿠로코가 소리를 질렀지만 아오미네에겐 들리지 않았다. 분노로 눈가를 붉히며 아오미네가 굳어있는 사람들을 향해 격노했다.

 

   “짐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소중한 아이다! 네깟 것들이 뭐라고 그 아이를 남창이라 욕하느냐!”

 

   “폐하, 폐하!”

 

   “다시는 이 일을 입에다 올리지 마라!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내 귀에 들어온다면 그 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갈하는 아오미네의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해 모두들 얼어붙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아오미네가 정전을 빠져나갔다. 정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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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흑] 안식 (1)

단편 2015. 10. 21. 23:07


* 고전물 Au

* 황제 아오미네 다이키 x 명문가 자제 쿠로코 테츠야

* bgm을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국가를 지켜주는 문이자 궁으로 들어가는 문. 남들이 그렇게 높디높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궐문은 어린 쿠로코에겐 목이 빠질 만큼 고개를 들어야하긴 해도 심리적으로는 그렇게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서 열리기를 바랄 뿐.

 

   "그렇게 황태자 전하가 좋으냐, 테츠?"

 

   형들에게는 엄하고 엄하시지만 저에게만은 한없이 따뜻한 아버지가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쿠로코가 방긋 웃었다.

 

   "좋습니다. 저는 남자인데도 늘 예쁘다, 어여쁘다 해주시는 분입니다."

 

   쿠로코는 아버지를 따라 작은 손으로 꼭 붙잡고 종종 놀러가는 궁이 참 좋았다. 저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문이 열리고 나면, 늘 자신을 반겨주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간간히 쿠로코를 데리고 등청할 때면 폐하께서도 친히 왕세자 저하의 손을 붙잡고 문 언저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처음 궁을 방문했을 땐 성은에 감읍하다, 허리를 숙이는 아버지의 옷자락 뒤에 숨어 쿠로코는 댕그란 눈만 데굴데굴 굴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고 계신 폐하의 기백에 눌려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여 더듬더듬 인사를 하니, 마냥 귀여웠던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손길에 확 긴장이 풀려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그 때. 숙인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건 제 손보다 한 뼘 정도 커 보이는 까무잡잡한 손이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손과 같은 피부색의 다부진 얼굴, 장난기 주렁주렁 달린 눈매. 저보다 조금 큰 키, 그리고 씩 웃는 얼굴.

 

   쿠로코는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작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흠칫, 정신을 차리니 소년이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젓곤 허리를 숙여 쿠로코를 마주보았다. 쿠로코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지그시 지켜보던 소년이 입꼬리를 더 올려 웃으며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난 아오미네 다이키, 장차 이 나라의 주인 될 사람이다.”

 

   쿠로코가 머뭇거리자 아오미네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깨지고 말랑한 흰 손이 제 손을 답싹 잡아오자 아오미네의 눈매가 만족스러운 듯 가늘어졌다. 잘했다는 듯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쿠로코는 그저 웃어주는 아오미네가 겨울날 따사로운 햇빛보다도 마냥 눈부신데다가, 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이 강하고 단단해 홀린 듯 양손으로 한껏 붙잡았다. 울렁이는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더 방문한 궁에서, 아버지 옷자락을 놓고 아오미네의 손을 잡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둘은 아오미네가 머물던 거처의 뜰에서 자주 놀곤 했다. 겨우내 한껏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새로운 생명이 움틀 때 즈음, 쿠로코는 평소처럼 아오미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오미네가 옷자락에 손바닥을 슥슥 문대고 쿠로코의 작은 손바닥을 감싸듯이 쥐었다. 아오미네의 손은 첫 만남 때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따듯한 봄바람이 둘의 뺨을 간지럽혔다. 아오미네가 입을 열었다.

 

   “벚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다. 보러가지 않으련?”

 

   “좋아요.”

 

   종종걸음으로 좇아간 뒤뜰에는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양 팔을 뻗어 껴안아도 모자랄 듯 한 커다란 나무에 하이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을 쿠로코는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아오미네가 웃었다.

 

   “맘에 드느냐.”

 

   “예, 저하. 벚꽃이 정말 예쁩니다!”

 

   벚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지 않게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코에 아오미네가 다시금 낮게 웃었다. 쿠로코는 신이 나 나부끼는 벚꽃 잎 사이로 뛰어들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꽃잎을 좇아 사뿐사뿐 발을 놀리는 모습이 작은 나비인 양 사랑스러웠다. 잠깐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아오미네도 꽃잎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쿠로코가 허릴 숙여 꼬물꼬물 무언가를 집어 들고 아오미네에게 다가왔다. 쑥쓰러운 듯 한동안 등 뒤에 감추고 머뭇거리다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벚꽃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가지였다. 놀란 아오미네가 눈을 크게 떴다.

 

   “나에게 주는 것이더냐.”

 

   끄덕끄덕. 눈을 꼬옥 감은 채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흔드는 쿠로코가 참으로 사랑스러워 아오미네는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흠칫 놀라던 쿠로코가 잠시 후 얌전히 팔을 들어 허릴 껴안고는 꺾은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며 품 안에서 웅얼거렸다. 오랫동안 궁에서 살며 만나보지 못했던 순수하고 맑은 영혼.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욕심이 났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아오미네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작은 몸은 더 가까이 안겨왔다.

 

   “옆에 있거라.”

 

   “…?"

 

   “평생 내 옆에 있어.”

 

   “저하…?”

 

   “내 나중에 가지에 손이 닿을 만큼 자라면 더 좋은 가지를 꺾어다주마. 그러니 내 옆에 있거라.”

 

  순진한 아이는 말속에 숨은 음험한 소유욕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하구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오미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송보송한 살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는 눈매에 빛이 번쩍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소년과 아이는 부쩍 자랐다.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사내의 티가 풀풀 났다. 어깨는 늠름하게 벌어지고, 처음 만났을 때 한 뼘 정도였던 키 차이는 훌쩍 벌어져 1척이 되었다. 늘 아이는 왜 차이가 줄어들지 않냐고 입을 내밀며 가끔 투정을 부렸지만 아오미네에겐 그 모습도 그저 어여쁠 뿐이었다.

 

  “좋지 않으냐. 너를 이리 한품에 안을 수 있고. 나는 테츠가 더 자라지 않았음 좋겠구나.”

 

   하하, 웃으며 자신을 품에 안으려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도 얼굴을 붉힐 뿐,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쿠로코는 자라면서 감정표현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방긋 웃는 웃음보다도 잔잔히 입가에 미소만 걸치는 일이 많아졌는데 아오미네는 그게 아쉬워 부러 방금처럼 과장된 행동이나 말을 하곤 했다. 쿠로코는 핀잔을 주면서도 노력에 답해주듯 아침 햇살처럼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평생 옆에서 볼 수 있다면, 아오미네의 바람은 소박하면서도 사치스러웠다.

 

   낮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뒤뜰에 잔디가 푸르게 자라 미지근한 바람에 흔들릴 때면 쿠로코는 잔디 위에 앉아 책을 읽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집안의 자제답게 또래들은 어렵다, 혀를 차는 책도 끝까지 붙잡고 읽어나갔다. 집중할 때면 자신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만 뚫어져라 보는 쿠로코의 곁에서 아오미네는 서운하면서도 정갈한 옆모습이 또 곱고 고와서,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숨죽여 바라보곤 했다.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불쑥 아오미네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쿠로코가 의아한 듯 아오미네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오미네가 이전의 그 얼굴 그대로 씩 웃고는 덥썩 쿠로코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당황한 쿠로코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 남들이 체통 없다 욕합니다.”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나는 곧 황제가 될 사람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날 쳐다보지도 않으니 그런다.”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문 쿠로코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오미네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뚫어져라 사랑스러운 얼굴을 응시했다. 테츠,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에 입술이 간지러웠다. 테츠. 이름이 불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눈매가 어여뻤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독점욕 가득한 시선에 쿠로코가 슬쩍 눈을 피하자 아오미네가 덥썩 쿠로코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저하…!”

 

   “쉿.”

 

   저를 부르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적당히 도톰해 구미를 돋우었다. 아오미네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정처 잃은 듯 떨리던 쿠로코의 눈꺼풀이 감겨들고,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워지다 하나로 합쳐졌다. 겹쳐진 입술이 심장이 뛰듯 욱신거리면서도 간질간질했다. 맞닿은 쿠로코의 입술이 약간은 가칠하고, 손끝엔 긴장해서 굳어진 쿠로코의 목이 느껴져 아오미네는 입을 맞댄 채 피식 웃었다. 공기가 빠지는 그 소리에 쿠로코가 번뜩 눈을 뜨더니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뒤로 빼려 움찔거리며 힘을 줬다. 하지만 여전히 붙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손 덕분에 쿠로코는 동그랗게 떠진 눈과 단풍잎처럼 물든 얼굴을 고스란히 아오미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쿠로코가 눈을 내리떴다.

 

   “그만 좀 놀리세요.”

 

   “테츠가 너무 귀여운 걸 나더러 참으라고 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

 

   “아직도 제가 그렇게나 어여쁩니까.”

 

   당황한 나머지 평소에는 뱉을 엄두도 못 냈을 말을 하며 쿠로코가 눈가를 찡그렸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아오미네가 나른하게 코끝을 부비며 하늘색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어여쁘다. 홍시처럼 깨물고 싶게 달아오른 뺨도 예쁘고, 오롯이 나만 담고 있는 네 물빛 눈동자도 예쁘다. 앙증맞은 코는 귀엽고 앵두같은 입술은 먹음직스럽다.”

 

   “….”

 

   “입맞춤은 몇 번 해봤는데도 여전히 처음처럼 몸을 굳히는 네가 그냥 사랑스럽다.”

 

   다시 말을 잃고 터질 듯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무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몸을 돌려 쿠로코의 허리를 껴안았다.

 

   “네가 좋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대가 좋았어.”

 

   “….”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상대에게서 한동안 대답이 없자 아오미네가 눈만 들어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아직 붉은 얼굴을 한 쿠로코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오미네가 얼른, 속삭이듯 채근하자 쿠로코의 고개가 푹 숙여지고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왔다.

 

   “저도, 저도 저하가 좋습니다.”

 

   “….”

 

  “알면서 물어보지 마세요.”

 

   부끄러워 귓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들 생각도 않는 쿠로코를 환한 미소를 지은 아오미네가 세게 끌어안았다. 말을 들은 것뿐인데도 입안이 달달했다. 아랫것들이 수근거려도 상관없었다. 품안의 제 사람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웠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하길. 풋풋한 어린 연인은 서로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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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흑] Lunch time

단편 2015. 9. 29. 23:30
   맛있는 밥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삶이 단순하고 지루해질 수록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난다. 새로운 식감, 입을 가득 채우는 재료 본연의 맛, 눈을 사로잡는 가지각색의 외관까지. 좀 더 맛있고 신선한 음식을 찾아 헤매는 일은 기대감을 동반한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특히나 틀에 박힌 삶을 사는 회사원에겐 더더욱.

  점심시간인 1시가 되기 30분 전부터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진다. 사원들이 1분마다 한 번씩 시계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휙휙거리는 소리가 잦아질 수록 과장인 미도리마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던 타자를 멈추고 미도리마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시계를 흘긋거리기만 하는 건 귀여운 축이었다. 벌써부터 의자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롯이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쿠로코 대리 뿐이었다. 그게 썩 마음에 든 미도리마는 쿠로코에게 보상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1시 00분 00초가 되자마자 사원들은 재빨리 옷과 지갑만을 챙겨 앞다투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곧 미도리마와 쿠로코만이 남았다. 쿠로코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고 의자를 밀어넣자 그것을 주시하고 있던 미도리마가 쿠로코를 불렀다.

  "어이, 쿠로코."
 
  "네, 과장님."

  "오늘 점심 식사는 같이 하자는 거다. 내가 맛집을 가르쳐주지."

  " ...? 괜찮습니다만."

  "내가 사주고 싶다는 거다. 따라오도록."

  그렇게 말하고서 먼저 자신을 지나쳐 가버리는 미도리마에 쿠로코는 어영부영 빠른 걸음으로 그를 좇았다. 기다려주지 않고 긴 다리로 빠르게 걸어가는 미도리마를 따라가는 일은 쿠로코에게는 꽤 벅찬 일이었다. 어디를 가냐는 질문에도 대답해주지 않으니 그냥 묵묵히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걷던 그가 멈춘 곳은 어느 허름한 가게 앞이었다. 

  "들어가지."

  "네."

  안은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테이블에 사람이 꽉 차있었다는 거다. 둘이 앉을 자리만 빼고.

  "타이밍이 좋았군."

  미도리마가 먼저 가서 자리에 앉자 쿠로코도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맞은 편에 앉았다. 곧 주방 아줌마가 물을 가져다주자 미도리마가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순두부찌개 둘. 메뉴판에 선을 찍찍 그은 아줌마가 주방으로 가자 미도리마가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여기 순두부가 일품이라는 것이야. 쿠로코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쿠로코는 어색함에 눈동자만 굴리다 말고 슬쩍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미도리마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식당과 묘하게 겹치는 분위기에 쿠로코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과장님은 이런 곳에도 식사하러 오는 구나.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칼질할 것 같은 사람인데,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빤히 미도리마를 바라보고 있는데 미도리마가 눈을 떠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쿠로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애초에 둘이 같이 있던 적이 거의 없던 탓에 시끌벅적한 식당 내에서 둘 사이에만 묘한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끓고있는 뚝배기 두 개가 올라가있는 냄비를 두 사람 앞에 탁탁 놓았다.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미도리마가 먼저 고개를 돌리자 쿠로코도 앞에 놓인 순두부 찌개를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 안에는 새하얀 순두부가 달싹이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빠알간 고추기름과 코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가 저절로 입에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쿠로코는 잘 먹겠습니다, 작게 인사를 하고는 숟가락으로 순두부를 떠 입으로 가져갔다. 혀끝에 닿은 순두부가 씹을 틈도 없이 뜨끈하고 몽글몽글하게 녹아 넘어갔다. 두부 안까지 배인 짭조름한 간이 예술이었다. 두부를 꿀꺽 삼킨 쿠로코가 작게 와, 감탄했다. 미도리마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쿠로코가 순두부찌개를 떠 밥에 비비자 미도리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있다는 것이야."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뿌듯해했다. 소담스럽게 볼을 부풀려 밥을 먹는 쿠로코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순두부찌개를 깨끗이 비웠다.

  극구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미도리마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쿠로코가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은 볼을 하곤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흥. 알았으면 됐다는 거다. 밥 먹는 것에도 인사를 다하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지."

  "과연 그렇군요."

  이 날을 계기로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종종 점심을 함께하곤 했다. 쿠로코가 추천해주는 집을 가기도 하고, 미도리마가 맛집을 안내하기도 했다. 신선한 생과일이 가득한 크레페부터, 정갈한 한정식과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중식, 활어를 잡아 얼큰하게 끓여 나오는 매운탕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시간 반 남짓 되는 점심시간을 미각을 충족하게 채워주는 음식과 함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쿠로코의 자리가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 비어있었다. 나중에 전화가 왔는데 알고보니 감기라 출근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미도리마는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으며 오늘은 전에 먹었던 순두부찌개를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여전히 사원들이 우루루 소란스럽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도리마도 겉옷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왔다. 처음 쿠로코랑 같이 밥을 먹으러 갔을 땐 반팔이었는데 어느덧 쌀쌀해져 자켓을 챙겨야할 날씨가 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나. 미도리마는 쿠로코랑 같이 밥을 먹은 날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여전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순두부 찌개 하나. 주문을 하고 미도리마는 무심코 비어있는 자신의 앞자리를 보았다. 혼자 밥을 먹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는데 오늘따라 빈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낯설어하며 미도리마는 벌써 제 앞에 놓인 순두부찌개를 향해 숟가락을 들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빨간 고추기름도, 뜨끈한 국물도. 몽글몽글한 두부도. 맛있었다. 분명 맛있었는데 뭔가 부족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찌개를 떠먹으며 미도리마는 부족한 게 뭘까 생각했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운 점심이었다.

  쿠로코는 그 날 이후로 이틀을 더 결근했다. 미도리마는 그 이틀동안 쿠로코와 먹었던 음식들을 다시 먹었다. 쿠로코가 맛있다고 추천해 먹었다가 의외로 나쁘지 않게 먹었던 바닐라 쉐이크는 기분 나쁠 정도로 더럽게 달았고 담백하고 건강한 느낌이었던 고등어 구이 백반은 비린내가 났다. 미도리마는 먹다 말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음식이 맛이 없는건지. 미도리마는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다음날, 쿠로코가 출근했다. 며칠 사이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헬쓱해져 있었다.

  "이젠 좀 괜찮냐는 것이야."

  "쉰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미도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가려 몸을 돌리자 쿠로코가 미도리마를 불렀다. 과장님. 미도리마가 몸을 돌려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어제 저번에 과장님께서 맛있다고 추천해주셨던 죽집에서 죽을 사서 먹었는데..."

  "그랬는데?"

  "과장님이랑 같이 갔을 때는 맛이 있었는데 집에서 먹으니 묘하게 뭔가 부족했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네요."

  "... 나도 얼마 전에 순두부 찌개를 먹으러 갔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아...?"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다 갑자기 든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혹시 나 혼자 먹어서 그렇다는 것인가...?'

  '설마 과장님이랑 같이 안 먹어서 맛이 없었던...'

  미도리마는 민망한 기분에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손 끝으로 섬세하게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평소에는 사용하지도 않던 사원용 메신저를 켰다.

  [To. 쿠로코 테츠야. 오늘 점심은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가자는 것이야.]

  띠링. 쿠로코의 컴퓨터에서 맑은 소리가 나고 몇 초 후,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쿠로코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자판을 두드렸다. 잠시 후, 미도리마의 컴퓨터에서 같은 알림음이 들렸다.

  [To. 미도리마 과장님. 좋습니다. 오늘 점심은 굉장히 맛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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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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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흑 / 청흑 / 원온원샌드 / 아오쿠로키세 / 청흑황

* 조직물 같지 않은 조직물 AU입니다.

 

* * *

 

  아오미네는 입구 앞에서 풀어제꼈던 넥타이를 바로 정리했다. 딱 맞게 맞춰 입은 정장이 마치 아오미네를 위한 옷인 듯 몸에 착 감겨있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에 클럽을 드나드는 여성들이 힐끔힐끔 아오미네를 훔쳐보았으나 아오미네는 그냥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테이코 안으로 들어갔다. 매니저가 안에서 후다닥 뛰어나와 복도 끝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웬만한 집보다 넓은 방에는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비싸게 보이는 양주들이 놓여 있었다. 아오미네가 성큼성큼 가장 안쪽에 반쯤 눕듯 앉자 매니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오미네는 대충 휙휙 방 안을 둘러보았다.

 

  ‘대체 테츠는 어떻게 들어올 생각인 거야...’

 

  아오미네가 다리를 덜덜 떨며 온더락 잔에 얼음을 짤랑짤랑 넣는 순간 룸의 문이 열리고 아까의 매니저가 들어와 옆으로 섰다. 그리고 그 뒤로 아오미네와 비슷한 키의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따라 들어왔다. 안내 고맙슴다, 매니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잘 관리 받은 듯 미끈했고 손톱은 반짝거렸다.

 

  “좋은 방이네요~ 역시 급이 다르네. 늦어서 미안함다.”

 

  빙글 돌아서며 아오미네를 향해 실없게 실실 웃는 남자를 아오미네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쳐다보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쿠로코... 씨? 무례한 방법인데도 만난다고 해줘서 고맙슴다.”

 

  “뭐, 별로. 앉지.”

 

  아오미네가 잔에 양주를 채우고는 들어올리며 앞쪽의 소파를 향해 잔을 까딱거렸다. 남자가 털썩 소리 나게 앉고선 허리를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받치고 깍지를 꼈다. 아오미네는 그제서야 눈을 돌려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남자는 굉장히 미남자였다. 겉모습만 보기엔 이쪽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예계 쪽이면 모를까. 탈색을 몇 번이나 했을 금발 머리카락은 조명 아래서 오히려 결 좋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긴 속눈썹은 예쁘게 말려 올라가 있고 눈매는 갸름하지만 깊이가 있었다. 턱선은 날카로웠고, 전체적인 수트도 늘씬하게 떨어졌다. 이런 외모의 소유자가 눈앞에서 사람 좋게 싱긋 웃고 있으니 아오미네는 의중을 모르겠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제 이름도 모르고 온 거죠? 제 이름 키세 료타임다! 편한 대로 불러줘요.”

 

  키세가 이름을 말하는 찰나 문이 열리고 깊게 파여져 있거나 몸에 딱 달라붙은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오미네는 테츠가 말한 접대가 이건가... 하고 심드렁하게 여자들을 훑어보았다.

 

  “이건...?”

 

  키세는 곤란한 듯 애매한 표정으로 아오미네를 바라봤다.

 

  “명색이 접대인데 여자가 빠지면 쓰나. 이 정도는 그쪽도 많이 하지 않나?”

 

  아오미네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입에 기울이자 키세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아오미네와 키세의 옆자리에 앉았다. 키세는 금방 페이스를 찾아 웃어보이며 상대를 해주었다. 흥미 없이 옆의 여자의 어깨를 감싸던 아오미네는 갑자기 누가 제 무릎 위로 올라타 앉기에 눈만 올려 쳐다보다 놀라 숨을 삼켰다. 옅은 화장을 한 채 가발을 쓰고 옆이 터진 붉은 색 차이나 원피스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쿠로코였다. 경악한 아오미네가 입을 뻐끔거리자 쿠로코가 목을 끌어안으며 귓가로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알아서 들어온다고 했잖아요. 표정 푸세요. 다 들킬 생각입니까.”

 

  정신이 든 아오미네가 키세 쪽을 보자 키세는 여자들을 상대하느라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쿠로코의 허리에 팔을 감자 쿠로코가 한쪽 팔은 풀고 한쪽 팔은 목에 두른 채 매끈한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가 선정적이었다. 아오미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여유로운 척 다시 술잔을 들자 키세가 여자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퍼뜩 술을 따라주며 쿠로코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는 여자예요? 예쁘네요.”

 

  “평소에 좀 예뻐하는 계집년이야. 여튼 오늘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아오미네가 평정을 가장하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아, 그거 말이죠... 하며 입을 연 키세는 묘하게 뜸을 들이다 갑자기 눈을 휘어 웃었다. 입과 눈은 웃고 있는 반면 차가운 눈빛이 이질적이었다.

 

  “그건 그쪽 말고 제대로 된 보스랑 얘기하고 싶은데.”

 

  “...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못 알아듣는 거 아니죠? 척하는 거죠?”

 

  “무슨 소리하냐. 내가 보스인데 누굴 찾아.”

 

  “흐응. 이렇게까지 말해도 어쩔 수 없나. 좋아요. 그냥 말할게요. 그쪽 말고 진짜 ‘쿠로코 테츠야’ 랑 얘기하고 싶다구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아오미네가 굳어있는 사이 키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오미네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오미네도, 쿠로코도 아무 말 않고 키세를 올려다봤다. 웃는 표정을 유지한 키세가 손을 뻗어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코의 턱을 쥐곤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쿠로코와 눈이 마주치자 키세가 더 짙게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쿠로코 씨?”

 

  아오미네가 술잔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으나 키세는 신경 쓰지 않고 쿠로코만 빤히 바라봤다. 쿠로코도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천천히 아오미네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하네요.”

 

  “칭찬이죠? 고맙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빙글빙글 웃는 표정을 한 키세가 유유히 손을 뻗어 쿠로코의 가발을 벗겨냈다. 벗으니까 더 예쁘네요. 키세의 손이 천천이 입가로 내려왔다. 엄지손가락이 느릿하지만 세게 쿠로코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걸 본 아오미네가 벌떡 일어나는 동시에 쿠로코가 키세의 손을 쳐냈다. 매정해라. 키세가 스르르 웃으며 손을 뒤로 뺐다.

 

  “나랑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쿠로콧치, 아, 애칭이에요. 여튼 쿠로콧치, 다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하고 말할게요. 지금 내가 어디 노리는지 다 알고 있죠?”

 

  쿠로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뺏기면 좀 곤란할 거라 생각하는데 말임다.”

 

  “그렇게 쉽게 뺏길 리가요. 거기 사람들, 주먹 꽤나 쓰는 사람들입니다..”

 

  “흐응.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아요?”

 

  씩 웃은 키세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건 작은 USB 였다.

 

  “그 가게, 술집이랑 클럽인 것 같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

 

  “필로폰이랑, 코카인... 또 LSD인가?”

 

  “...”

 

  “내가 아직 경찰 쪽에 이름이랑 얼굴이 안 알려져서요. 마약 신고하면 포상금이 얼마더라~?”

 

  USB에 달린 고리를 손가락에 끼워 빙빙 돌리며 웃는 키세를 한 방 먹여주고 싶다고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쿠로코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뭔가요.”

 

  “대화가 빨라서 좋네요. 많은 거 안 바라요.”

 

  키세는 대답 없이 뒤의 아오미네에게 다가가 재킷 주머니에 USB를 넣고는 쿠로코의 허리를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랑 한 번만 자요, 쿠로콧치.”

 

  “뭐, 이 새끼야?”

 

  와장창. 키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오미네가 테이블을 밀치며 일어나 주머니의 USB를 거칠게 바닥으로 던지고선 키세의 팔을 붙잡았다. 쿠로코는 미동 없이 안긴 채 키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테츠, 하지마! 경찰 쪽 루트 찾아보면 되잖아!”

 

  아오미네가 애타게 소리 질렀으나 키세는 쿠로코만을, 쿠로코는 키세만을 보며 상대를 가늠했다. 아오미네에게만 긴박한 몇 초의 순간이 지나고 쿠로코가 눈빛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츠!!!”

 

  아오미네가 절박하게 외쳤지만 쿠로코는 손을 들어 제지하며 허망한 표정의 아오미네를 뒤로 하고 물었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겁니까?”

 

  “물론이죠! 좋게 합칠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쿠로콧치한테 나쁘게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좋습니다. 어디서 할까요?”

 

  “나는 쿠로콧치만 괜찮으면 지금 여기서도 괜찮은데.”

 

  “알겠습니다. 아오미네군,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테츠...!”

 

  “아오미네 군이 저랑 즐기는 것처럼 키세 군도 그런 거겠죠. 애인 사이도 아닌데 뭐 어떤가요. 잠시 후에 뵙죠.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아오미네는 유유자적하게 소파에 앉아 술을 홀짝이는 키세를 씩씩거리며 바라보다 거칠게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허튼 수작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있는 힘껏 눈을 부라리고 나가는 발걸음이 허망했다.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보며 아오미네는 씁쓸함과 치밀어오는 화에 애꿎은 주먹만 세게 쥐었다.

 

  아오미네가 나가자 키세가 쿠로코를 향해 손짓했다.

 

  “좋아요, 쿠로콧치. 사실 지금 복장도 맘에 들어요. 치파오 꽤 좋아하거든요. 아까 다리 꼬을 때 완전 움찔한 거 알아요?”

 

  “의외네요. 키세군도 이쪽 취향이었습니까. 주위에 여자 많을 것 같은데요.”

 

  쿠로코가 소파 위로 올라와 다리를 벌리고 키세의 무릎 위에 앉았다. 호오. 키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사실 남자는 처음인데. 쿠로콧치네 똘마니한테서 재밌는 걸 들었거든요. 아오미넷치, 아, 사실은 이름 다 알고 있었어요. 여튼 저 아오미넷치가 쿠로콧치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재밌기도 하고 확인하고 싶기도 해서 꾸며봤어요.”

 

  제법 고생했다구요? 하며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는 키세를 내려다보며 쿠로코는 반 정도는 꿰여있던 치파오의 끈을 풀었다. 점점 벌어지는 틈 사이로 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키세가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손바닥을 대고는 치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에 감겨들었다. 키세는 속으로 감탄하며 이내 양손으로 허벅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흥분되는 듯 키세의 눈이 가늘어졌다. 쿠로코는 그걸 보며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목근처의 끈 마저 풀었다. 치파오가 주륵 흘러내렸다.

 

  방 안은 후끈한 열기와 끈적한 공기로 데워졌다. 키세가 쿠로코의 몸 위로 엎어지며 거친 숨을 내쉬자 쿠로코도 눈을 깜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꼬리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둘 다 격했던 정사에 축 늘어져 숨만 고르기를 수십 초, 키세가 몸을 일으켰다. 

 

  “장난 아니네요, 쿠로콧치. 나 이렇게 미친 듯이 한 거 처음이에요.”

 

  “키세군도 만만치 않아요. 아오미네군 못지 않네요.”

 

  두 사람은 거세게 숨을 몰아쉬다 말고 피식 웃었다. 키세가 쿠로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렸다.

 

  “저기 쿠로콧치, 우리 동업 안 할래요?”

 

  가만히 생각해보던 쿠로코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오미네군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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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흑 / 청흑 / 원온원샌드 / 아오쿠로키세 / 청흑황

* 조직물 같지 않은 조직물 AU입니다.

 

  “오셨습니까, 형님!”

 

  우렁찬 소리와 함께 검은 양복을 빼입은 장정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는 광경은 박력이 넘치다 못해 위압감이 흘렀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움츠러들 압력이었다. 하지만 고개 숙인 장정들 사이로 휘적휘적 지나가는 키 큰 남자에게서 긴장감이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어, 그래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가락에 걸린 USB를 휙휙 돌리는 모습이 오히려 여유 만만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의 긴장한 고개가 남자의 느긋함에 풀어졌다. 빳빳함은 어디 가고 느슨해진 등허리 위로 남자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눈치를 보다 숙이느라 굳어있던 허리를 펴려는 찰나, 남자가 갑자기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방금 흐물하게 서있던 새끼.”

 

  “...”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새끼라 봐준다. 다음부터 걸리면 대가리 박을 줄 알아.”

 

  “네, 넵!”

 

  찬물을 끼얹은듯 한 정적 속에서 눈동자만 움직여 쳐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푸르게 주위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신입은 총알같이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해 각을 잡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남자는 눈에 힘을 풀고 아까처럼 휘적휘적 걸어가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 양쪽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초 두 명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남자는 손가락을 까딱여보이곤 푹신해 보이는 검정색 가죽 의자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세트로 보이는 큰 책상 위에는 잘 닦여서 반들반들한 명패가 놓여있었다.

 

  [쿠로코 테츠야]

 

  검정 가죽 의자의 주인 이름이었다. 남자는 보초들을 향해 한 번 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보초 한 명이 아까처럼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남은 한 명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뭐야?”

 

  “...”

 

  “나가라는 소리 못 들었냐?”

 

  “...”

 

  “이 새끼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남자가 의자를 세게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힘없이 팽개쳐져 느릿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는 성큼성큼 보초에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보다도 좁은 거리까지 바싹 다가간 남자의 큰 키와 덩치에 비해 보초는 작고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는 낮게 읊조렸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새끼야. 그러자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보초가 손을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아-, 아. 혹시 모르잖아, 테츠.”

 

  “됐다구요.”

 

  “흐응. 이렇게 붙어있으니까 좋지 않아?”

 

  남자가 테츠에게 좀 더 다가가 붙어 양손으로 엉덩이를 꾹 잡아당겼다.

 

  “하나도 좋지 않은데요. 떨어져주시죠.”

 

  “쯧, 앙탈은.”

 

  “앙탈 아닙니다.”

 

  알았어, 예쁜이. 한쪽 눈을 찡긋한 남자는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테츠는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 쪽의 구겨진 바지를 탁탁 털어 정리하고는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뱉고는 그 옆에 다가가 섰다.

 

  “이게 그 자료입니까, 아오미네 군?”

 

  “엉. 근데 테츠. 여기에서까지 이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 애들은 괜찮았잖아.”

 

  테츠는 아오미네가 들고 온 USB를 노트북에 연결하며 대답했다.

 

  “어디서 말이 새어나갈지 모르잖아요. 최근 다른 조직들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신입들 중엔 아오미네 군이 제 이름가지고 활동한다는 걸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을텐데. 미리 조심하자는 차원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불편하단 말이지.”

 

  “뭐가요.”

 

  “예전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뽀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기다려야 하잖아. 연기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저를 상대로 가볍게 장난치는 거 이제 그만두세요. 아무한테나 그러면 욕먹습니다.”

 

  “뭐 어때~ 나만 좋으면 됐지. 테츠도 싫은 건 아니잖아?”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여기 적혀있는 게 사실인가요?”

 

  쿠로코의 물음에 빙글빙글 웃던 아오미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사실이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사뭇 어두웠다. 아오미네의 손가락이 노트북에 띄워진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도. 이쪽 한 군데, 저쪽 한 군데 이런 식으로 끄트머리만 가져가길래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막상 모아놓고 보니 녀석들한테 먹힌 가게가 제법 돼. 치고 오는 속도가 존나 빨라. 이 정도까지 영향력 있는 애들은 아니었는데 윗대가리가 바뀌었다나봐. 머리가 여간 좋은 게 아냐.”

 

  “그렇군요. 게다가 이 가게를 뺏은 걸 보니 어디를 노리는지 예상이 가네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구역 중 가장 수입이 많은 지역이겠죠. 뺏기면 곤란하겠습니다.”

 

  “하, 근데 먼저 쳐들어갈 구실이 없어. 그냥 싸워서 이기면 가질 수 있는 곳만 교묘하게 가져가고 있잖아. 곧 노른자 구역까지 치러 오겠지만. 씨발. 뱀 같은 새끼. 그전에 다 쳐부수자, 테츠.”

 

  쿠로코 테츠야는 대답 없이 노트북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아오미네가 옆에서 채근댔다. 응? 테츠으. 간만에 몸 좀 풀자. 근질근질해. 엉? 테츠! 테...!

 

  “이상하네요.”

 

  “엉? 뭐가.”

 

  쿠로코의 손가락이 제법 수입 금액이 큰 가게를 가리켰다.

 

  “이 가게, 오기와라군 담당 아닌가요? 제법 중요한 곳이라서 밑에 아이들을 쓰지 않고 부러 배치시켰는데.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 녀석, 싸움 제법 하는데 말이야.”

 

  “좀 더 자세히 알아봐주세요. 내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가게에 도청기 같은 게 설치되어있는지. 아무거나 좋습니다.”

 

  알았어. 대답하는 아오미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밤 늦은 시각, 침실의 흐릿하게 불이 켜진 침실엔 두 명의 그림자가 얽힌 채 어른어른 거렸다.

 

  “흐, 아오미네, 군...! 이럴려고 부른 거 아니잖, 습니까...! 읏!”

 

  “조금만. 끝나고 말해도 안 늦어.”

 

  쿠로코가 아오미네의 집에 찾아온 건 아오미네가 저번에 말했던 걸 알아냈다고 얘기한 까닭이었다. 쿠로코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아오미네가 끌어안고 입을 부비며 침실로 밀어넣을 걸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터였다. 아오미네는 침대에 쿠로코를 눕히고 본격적으로 몸 위에 올라타 하얀 와이셔츠를 잡아 뜯었다. 바지는 이미 벗겨져 거실에 팽개쳐진지 오래였다. 쿠로코가 눈가를 찡그리며 소리쳤다.

 

  “아오미네군!”

 

  “테츠, 나 급해. 우리 오래 안 했잖아. 응?”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끌어안아 얼굴을 부비작거리며 애원했다.

 

  “한 번만... 끝나고 바로 말할게.”

 

  응? 응?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애처롭게 바라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는 한숨을 쉬며 체념한 듯 몸에 힘을 뺐다.

 

  “한 번만입니다. 넣고 싸면 끝이에요. 알겠습니까?”

 

  쿠로코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면서도 얌전히 눕자 아오미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금 몸에 코를 박았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쉬어 체향을 음미하면서 옆구리 부근을 문지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테츠, 다 씻었으면 이리와.”

 

  아오미네가 젖은 몸으로 대충 속옷만 주워입은 채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됐습니다. 쿠로코는 샤워가운을 여미며 침대 끝 가장자리에 거리를 두고 앉았다. 매정하긴. 아오미네가 툴툴거렸지만 쿠로코는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저번에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말이야. 테츠 말이 맞았어. 쥐새끼 한 명이 있더라고. 그쪽에서 그냥 간간히 묻는 거만 대답해주면 짭짤하게 쳐주겠다고 했나봐. 오기와라 가게도, 다른 곳도 다 조금씩 손댄 모양이야.”

 

  “간도 크네요. 아오미네군이 있는데.”

 

  “엉, 그래서 내가 조졌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끼가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는 새끼잖아. 잘했지?”

 

  “잘했습니다.”

 

  씩 웃으며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는 피식 웃으며 돌아갈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다시 와이셔츠에 팔을 꿰는 찰나, 근데..., 아오미네가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쿠로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거기 보스라는 놈이 널 만나고 싶대.”

 

  “...? 저를요?”

 

 “정확히는  ‘쿠로코 테츠야’ 겠지. 아마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쪽이랑 할 말이 있다고 전해라고 했다던데.”

 

  “뭐... 그렇습니까. 평소대로 아오미네 군이 저인 척 하고 가면 되는 거잖아요. 저도 부하인 척 같이 가면 되잖습니까.”

 

  “그게 좀 문제야.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어. 아무도 없이. 만나는 장소는 우리가 정해도 상관없대.”

 

  그리고... 아오미네가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느낌이 안 좋아.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쁘단 말이지.

 

  “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오미네 군은 평소대로 행동하세요.”

 

  “그리고?”

 

  “만나는 곳은 테이코로 하죠. 접대가 제법 괜찮으니까요. 여자들을 몇 명 넣을테니 거절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오미네군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제가 들어갈 방법은 알아서 생각하겠습니다.”

 

  “... 씁. 그래.”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얘기가 끝났다는 듯 다시 옷을 입는 쿠로코 때문에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찜찜한 듯 아오미네가 입을 쩝쩝 다시는 사이 쿠로코는 어느새 반듯하게 옷을 다 차려입고선 방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데려다 줄까, 자기야?”

 

  오래 고민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금방 찜찜함 따위 우주로 날려보낸 아오미네가 실실 웃자 쿠로코가 정색했다.

 

  “꺼지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 말고 애인이랑 이런 짓 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난 테츠랑 하는 게 좋은데. 테츠 엉덩이는 말랑말랑해서 좋아.”

 

  흐흐, 아오미네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양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잡고 주물거리는 시늉을 했다. 쿠로코가 조용히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잡아 들어 아오미네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제법 큰 소리가 나자 쿠로코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테츠으!!!”

 

  아오미네의 애타는 외침만이 빈 거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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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왜 찾았는데요?”

 

  “...” 

 

  “또 대답 안 하네. 왜 나를 찾았냐고요. 응?”

 

  묻는 소년의 눈동자가 언뜻 보기에는 호기심으로 번뜩이는 듯 했지만 쿠로코는 그 안의 이질적인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몰랐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쿠로코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키세군이, 제 수업에 결석을 계속 해서요. 자세한 상황을 알아야겠다 싶었습니다.”

 

  단 두 문장을 뱉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선생인 자신이 학생에게 답을 하는 것뿐인데도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건지 쿠로코는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아 시선을 피하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탁자 끝만 노려보았다.

 

  “아, 정말 타이밍 좋게 촬영이 있었어요. 못 믿겠음 매니저라도 전화 바꿔줄까요?”

 

  키세가 넉살좋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쿠로코는 쳐다도 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아니요, 그런 거라면 됐습니다.”

 

  “그게 다예요?”

 

  “답니다.”

 

  흐응, 재미없네. 키세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지자 쿠로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하려면 일단 눈앞의 저 화려한 얼굴이 없어야했다. 저도 모르게 자꾸 눈이 가서 보고 있게 되거나 찬란함에 얼굴이 붉어진다. 처음 보는데도 사람을 끄는 마성이 있는 미모였다. 쿠로코는 키세가 마저 일어나길 기다리며 아찔해질만큼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걷히질 않았다. 의아스러움에 쿠로코가 슬쩍 키세에게로 시선을 올린 순간 쿠로코는 흥미있는 걸 발견한 듯 휘어져있는 눈과 마주쳤다.

 

  “저기, 선생님. 나 지금 되게 재밌는 걸 알았는데.”

 

  “... 어떤 거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

 

  쿠로코는 말을 듣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소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눈앞의 소년은 예민하게 자신의 변화를 잘도 알아냈다. 어쩌면 자신이 생경한 감정에 숨기는 게 어설펐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키세가 타인의 감정 변화를 민감하게 잘 알아채는 걸지도 몰랐다. 어찌됐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키세가 자신이 지금 불안정한 상태임을 꿰뚫어봤다는 거다.

 

  선생님, 그거 알아요? 지금 맹수 앞에서 벌벌 떠는 아기 토끼같아. 왜 그렇게 떠는 거예요? 느릿하게 고개를 숙인 키세가 쿠로코의 귓가에 속삭였다. 은근한 입김이 귓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키세의 팔은 쿠로코의 양 옆에 몸을 가두듯 테이블을 짚고 있었다. 쿠로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동자만 굴렸다.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연신 눈만 깜박이며 밤색 넥타이만 노려보고 있는 와중 쿠로로의 몸이 휘청하며 강한 힘에 이끌려 일으켜졌다. 드르륵,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적막한 도서관에 울렸다. 어느새 제 허리에는 키세의 팔이 감겨있었다. 쿠로코의 눈이 크게 떠져 키세를 담았다.

 

  “사실 나 부른 거, 그게 끝 아니죠?”

 

  “... 끝입니다만.”

 

  “에이. 입으론 날 속여도 눈으로는 못 속여. 날 원하듯 바라보고 있었잖아. 다 알아요.”

 

  “...?”

 

  “모든 선생님들이 그래. 보충해주겠다, 상담 좀 하자, 하는 핑계를 대면서 나랑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들려고 안달이거든요. 보통은 여자 선생들이지만 가끔 남자 선생도 있었어요. 쿠로코 선생님도 그런 거 아닌가?”

 

  키세가 나른하게 웃으면서 한숨을 쉬듯 말을 뱉었다. 상대를 안쓰럽게 여기는 듯한 웃음도 함께. 쿠로코는 키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핑계? 둘만의? 남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멍해진 머리로 단어들을 조합하고 있을 때였다. 키세가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당겨 안으며 쿠로코와의 거리를 좁히고 얼굴을 더 가까이 했다.

 

  “뭐... 보통 때였으면 비아냥거리고 쫓아냈겠지만. 쿠로코 선생님은 마음에 들어요. 얼굴도 괜찮고 눈은 좀 예뻐. 체구도 안기엔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렇게 덜덜 떨면서도 용기를 낸 게 가상해.”

 

  잘했다고 칭찬 해줘야하나?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키세의 얼굴은 여전히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쳐다보는 시선에선 꿀이 떨어질 듯 황홀하고 달콤했다. 눈가와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키세의 손이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와 바지 위로 살을 한 움큼 꽉 잡자마자 쿠로코는 확 정신이 들었다. 어쩔 줄 모르던 두 팔을 뻗어 키세를 세게 밀쳐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키세는 쉽게 뒤로 물러나주었다.

 

  “밀쳐서 미안합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어요.”

 

  동요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달아올랐던 귓가와 뺨도 원래의 체온대로 돌아왔다. 쿠로코는 구겨진 옷을 툭툭 쳐 펴면서 키세의 팔이 닿았던 부분은 보란 듯이 세게 털어냈다.

 

  “호오.”

 

  키세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우지 않고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게 덜덜 떨던 아까와는 달리 이렇게 페이스를 찾아 금방 감정을 숨기고 침착해진 모습이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쿠로코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잘 모르겠다는 소문대로였다. 나이답지 않게 신비로운 느낌이 있다며 같은 반 여학생들이 가끔 얘기하는 걸 키세도 들은 적이 있었다.

 

  “아까는 제가 생각해도 좀 얼이 빠졌었네요. 다시 한 번 사과합니다.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어요.”

 

  “아니에요. 이해해요. 날 본 사람들은 전부 그런 반응이거든. 내가 너무 눈부신 걸 어쩌겠어요.”

 

  키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쿠로코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여학생들이 많이 따를 만하네요. 저도 살면서 키세군 같은 미모는 처음 보니까요. 한순간 혹했습니다.”

 

  “그래요? 영광이네요. 감정 없기로 유명한 쿠로코 선생님이 나한테 반할 줄이야.”

 

  “감정이 없진 않습니다. 반한 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좀 분하거든요.”

 

  “분해요? 내가 선생님한테 그런 짓해서? 미안해요. 사과할게. 하지만 나는 그런 의미인 줄 알았는걸. 흐흥. 그나저나, 나한테 반한 거 맞으면 아까 하던 거 마저 할래요? 나 선생님 꽤나 마음에 드는-”

 

  “아니요,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런 짓하는 키세군한테 짧게나마 반했다고 생각한 제가 멍청해서 화가 나네요.”

 

  “... 하?”

 

  “키세군이 남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학생 취급도 안 했을 겁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얼굴이 예쁘면 뭐합니까, 행동이 최악인데.”

 

  “뭐?”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단순히 키세군이 왜 수업에 나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키세군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는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세요. 기분 나쁩니다. 다음 수업시간에 보던지 말던지 하죠.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쿠로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잘 숨긴 듯 했지만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책을 쥐고 있는 손과 바삐 걸어가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하지만 휘청휘청 걸으면서도 한참 전의 저같이 얼빠진 표정의 키세가 잊혀지질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반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까부터 떨고있던 몸과 키세의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떨려오는 심장을 추스르며 쿠로코는 발을 재게 놀렸다.

 

  한편 키세는 쿠로코가 나가고 나서도 멍했다. 한 번도 면전에서 그딴 험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려 쫓아가려고 따라 나왔지만 벌써 쿠로코의 모습은 복도 끝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키세는 괜히 분한 마음에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크렸다. 꾹 다문 잇새 사이로 꾹꾹 누른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쿠로코... 테츠야. 당하지고 있지만은 않겠어.”

 

  키세가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도서관의 침묵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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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 키세 X 문학 선생 쿠로코 입니다.

 

  [2-1]

 

  쿠로코는 교실 문 앞에 서서 잠깐 문패를 올려다 보았다. 2학년 1반. 이 반에는 어떤 학생들이 있더라, 생각하는 쿠로코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모든 학생들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수업을 잘 따라오는 아이들이나 눈에 튀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있었다. 담당하고 있는 과목은 아이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문학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어째저째 자지 않고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늘 항상 있었다. 가끔씩 인사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 아이도 생겼다. 종종 학생들로부터 마실거리나 자잘한 사탕, 초콜릿을 받기도 했다.

 

  쿠로코는 현재의 자기 생활에 만족했다. 수업하는 것도 즐거웠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도 즐거웠다. 이런 나날만 지속된다면 남은 인생이 평화로울 것 같았고 여건만 된다면 좀 더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쿠로코의 속을 심란하게 만드는 학생이 바로 2학년 1반에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쿠로코의 평평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늘은 과연. 작게 한숨을 뱉으며 쿠로코는 닫혀있는 교실문을 열었다.

 

  엎어진 사람 반, 교탁에 올라서는 쿠로코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 정도. 그리고 역시나 비어있는 한 자리. 들리지 않게 가볍게 혀를 찬 쿠로코는 출석부를 집어들었다.

 

  "키세 료타군."

 

  "..."

 

  "키세 료타군?"

 

  "선생님, 키-쨩은 촬영갔어요~"

 

  또래와는 다른 성숙미 때문에 반에서 마돈나라 불리는 모모이가 대신 대답했다. 쿠로코는 감사의 의미로 살짝 눈인사를 하며 출석부를 체크해보았다. 결석. 결석. 결석. 이때까지 쭉, 단 한 번도. 학기가 시작하고 2달이 지난 지금까지 키세 료타는 자신의 수업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키세 료타. 학생들 사이에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제법 잘 나가는 하이틴 모델이라고 들었다. 한창 뜨고 있는 추세라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사인을 받겠다고 우르르 달려가는 걸 몇 번 목격했기도 했었으나 이러나 저러나 쿠로코한테는 그냥 계속 수업을 무단결석하는 학생일 뿐이었다. 자기를 만만하게 보는 건지 아니면 정말 늘 자신의 수업날만 촬영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곤란했다. 쿠로코는 펜으로 출석부를 톡톡 두드리다 말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학생에게 눈길을 돌렸다.

 

  "모모이 사츠키 양."

 

  "네, 네!"

 

  "혹시 키세군을 보면, 방과 후나 쉬는 시간에 날 찾아오라고 해주세요."

 

  "알겠어요!"

 

  테츠 선생님이 나한테 부탁을 했어! 상기된 얼굴로 그새 짝과 꺅꺅거리는 모모이를 잠깐 보다 쿠로코는 머리를 휙휙 저었다. 일단 수업에 집중하고, 키세군과는 나중에 대화를 하자. 쿠로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교과서를 집어들었다.

 

    "수업 시작합니다. 다들 교과서 126페이지를 펴주세요."

 

    네에- 아이들이 미적미적 책을 넘기는 걸 바라보며 쿠로코는 미리 봐왔던 수업 내용을 상기하고 분필을 쥐었다. 봄의 중반에 접어든 탓인지 살랑살랑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이들의 뺨을 훑고, 나른한 햇빛이 머리칼을 쓰다듬은 탓에 몇몇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교실에는 시를 읽는 쿠로코의 목소리만 울려퍼졌다.

 

  "석양빛은 난을 비추어 아름답고, 부드러운 바람은 사물을 부채질해 새롭다. 후지와라노 후사마에의 시입니다. 여기서 '난'은 새로운 식물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일본에 있었던 식물을 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관련된 얘기는 시간이 다 돼서 다음 시간에 마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쿠로코는 교과서와 자료를 한데 모아 교탁에 탁탁 두드리고 수업을 마무리했다. 흘깃, 시선을 던진 곳에는 여전히 비어있는 키세 료타의 자리가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키세는 수업 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전해두었으니 나중에는 오겠죠. 가볍게 생각한 쿠로코는 수업시간을 마치는 종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후에는 수업이 없으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 5교시가 끝난 2시 20분. 전체 일과가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괜히 미닫이문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 쿠로코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폐를 채우다 못해 충족감까지 들게 하는 고소한 책 냄새가 예전부터 참 좋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쿠로코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제일 좋아하는 자리인 안쪽 구석자리에 앉았다. 읽다만 책도 들고 왔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는 이 순간이 쿠로코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방과 후에 학생들이 와도 쿠로코의 존재감은 매우 옅어서 학생들이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느즈막한 시간까지 책을 읽을 요량으로 시간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며 쿠로코는 가름끈을 잡아당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이 쿠로코가 읽고 있는 책마저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쿠로코는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 뻐근한 목 근육을 풀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읽고 있던 문장의 끝을 보고나서야 어깨를 콩콩 두드리며 책을 덮었다. 남은 분량을 손가락으로 잡아봤더니 이틀만 더 읽으면 다 읽을 수 있을 듯 했다. 뿌듯한 기분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으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쿠로코의 시야 끝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걸렸다.

 

  그건 머리카락이었다. 기울어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결 좋은 블론드 빛깔의 머리카락. 그리고 흐트러진 얇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길고 얄쌍한 눈매와 매끈하게 똑 떨어지는 코, 복숭아 빛 입술. 날렵한 턱선과 그 턱을 괴고 있는 흰 손과 아몬드 모양의 손톱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제 앞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자고 있는 사람이 미인이라는 걸. 어느 것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쿠로코는 반짝임에 숨을 멈추었다.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났다.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까지 빛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조용한 손놀림으로 책을 정리하며 쿠로코는 오롯이 순수한 감탄만으로 눈 앞의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색색 숨을 뱉을 때마다 살짝 벌어지는 도톰한 입술이 예뻤다. 쿠로코는 홀린 듯 그 입술만을 바라봤고,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감겨져있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 안의 헤이즐넛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 것을.

 

  "아, 깜빡 자버렸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쿠로코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너무 집중해서 보고 있길래, 말을 걸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놀랐나봐요?"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쿠로코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따라 올려다봤다. 누구더라. 누구지. 머릿속에서 알고 있는 학생들의 얼굴이 휙휙 지나갔다.

 

"헤에. 눈동자가 하늘색이네. 신기해라. 나 일하는 곳에도 이런 색은 잘 없어요."

 

  불쑥 소년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쿠로코는 움찔하면서도 시선을 마주했다. 이 수려한 소년은 눈을 뜨니 눈을 감았을 때보다 분위기가 한층 더 화사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는 순수함이 감돌았던 얼굴에 지금은 알 듯 말 듯 미묘한 날이 서있다는 것. 어째서인지 쿠로코는 머릿속을 뒤지지 않아도 눈앞의 소년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하지만 이름은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

 

  "나 본 적 없죠? 나 누군지 알아요?"

 

  "..."

 

  "대답이 없네."

 

  학교 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최근 가장 떠오르는 하이틴 모델. 그 이름이-

 

  "키세 료타. 내 이름, 키세 료타예요."

 

  키세 료타.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순간 나비가 날개를 펴듯 세상의 모든 화려함이 키세를 감쌌다. 쿠로코의 눈이 번뜩 크게 떠졌다.

 

  "오늘 낮에 날 찾았다면서요, 쿠로코 선.생.님?"

 

 쿠로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해. 이 화려함은 위험하다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경보가 울렸다. 쿠로코는 마주 붙어있던 시선을 힘겹게 돌리며 아까부터 잡고 있던 책에만 애꿎게 꼬옥, 힘을 주었다. 키세의 진득한 시선이 얼굴에 치덕치덕 붙는 기분이었다. 깊은 아찔함에 쿠로코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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