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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7.12 [황흑] 어리광
  3. 2015.06.01 [청흑] 꽃잠

[적흑] waiting for you

썰 (?) 2015. 8. 7. 03:10

  여전하다, 고 생각했다.

  나른한 듯 보여도 매서운 눈매와 그 안의 붉은 눈동자. 미묘하게 다른 색깔인 두 눈동자가. 그리고 잔뜩 가시가 서있는 것 같이 날카로운 시선과는 달리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졸업을 하고 나면 보지 못 할 줄 알았다. 일단 서로 진학하는 학교가 너무 멀었고, 또 무엇보다 쿠로코 자신이 더 이상 아카시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거라 생각했다. 동경하는 마음을 담고 눈으로 좇던 아카시에게 연모의 감정이 섞여들어가던 그 어느 순간부터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이 작은 마음이 들킬까 두려웠다. 타오르는 색과는 달리 냉정한 눈동자가 자신을 경멸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시선을 애써 돌렸다. 서로가 읽던 책에 관해 간간히 나누던 대화는 물론, 필요 이상으로는 말도 섞지 않았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그렇게 꼭꼭 숨긴 애정이었다.

  그래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눈에서 멀어지며 식은 줄 알았던 감정이 메일 상단의 이름을 보자마자 요동치는 것이 느껴져서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마냥 멋져보였던 모습이 지금은 얼마나 더 활짝 피었을지 보고 싶었다. 예전과는 다른 게 있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욕심이 샘솟았다. 알겠다고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불안과 기대의 시간이 흐르고, 지금이 왔다.  

"오랜만이야, 테츠야."

"오랜만입니다, 아카시군."

  웃으며 인사하는 상대는 이제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자신을 쿠로코라고 불러주든, 테츠야라고 불러주든 상관 없이 심장이 떨린다는 사실이었다. 혹여나 목소리도 떨리는 건 아닐까 쿠로코는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도쿄에 아카시군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아카시군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다니 의외입니다."

"그래? 나는 늘 테츠야 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슬쩍 눈을 내리깔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차를 마시다 흘리는 대답에 쿠로코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 티도 내지 않았는데 벌써 들통나버린 것 같았다. 떨리는 손끝을 자근자근 누르며 쿠로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능청스럽네요, 아카시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런가? 하지만 사실이야. 난 늘 기다리고 있었어, 테츠야. 그때부터 쭉."

  그때부터, 쭉? 왜? 근거없는 기대감에 쿠로코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카시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 본 듯, 사람 속을 훅 들었다 놓았던 게. 아직 마음을 자각하지는 못한 채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아카시를 피하려 늦게 나오는 꾀를 부리다 되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아카시를 딱 마주쳤던 그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자신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저를 보던 아카시가 슬쩍 웃음을 머금고,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자신의 옆을 지나가기에

안심하려는 찰나,

"기다리고 있어, 테츠야."

  쿠로코는 숨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뭘?  뭘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네가 다른 눈으로 나를 좇는 그 날을."

  아카시는 의아한 말을 뱉은 뒤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쿠로코는 얼은 듯이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다른 눈. 눈. 다른. 그리고 그 순간, 쿠로코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카시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깨닫고 나니 이후가 두려웠었다. 아카시가 전과는 다른 시선이 닿고 나면 자신을 좋게 대할지 나쁘게 대할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후자가 두려워서, 쿠로코는 감추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꼭꼭 숨긴 애정이었다. 그래서였다.

  잊고있던 기억이 떠오르자 쿠로코는 소리없이 경악하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가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설마, 그 때부터. 후자가 아니라 전자였나? 쿠로코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복잡해져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겨우, 쿠로코는 빨리 아카시로부터 무언가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 무슨 의미인가요, 아카시군?" 

"…."

"아카시 군…!"

"쉿."

  휙, 바람소리가 났다. 눈을 잠깐 꾹 감았다 뜨니 코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맞댄 아카시가 눈 앞에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른쪽 눈동자가 번쩍였던 것도 같다. 어느새 쿠로코는 아카시의 품에 안겨있었다. 쿠로코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아카시 군…?"

"응."

  상대는 별 미동이 없어보였으나 가만히 숨을 고르며 안겨있으려니, 감겨있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아. 순간 모든 것이 훅 다가왔다. 그제서야 두루뭉실하던 게 감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깨닫고 나니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그래, 무척이나."

"늦게 알아서 미안합니다."

  대답없이 저를 힘있게 끌어안는 팔이 단단했다. 팔의 주인이 슬쩍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쿠로코가 품에 얼굴을 묻으며 강한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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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흑] 어리광

썰 (?) 2015. 7. 12. 00:29

"다녀왔습니다~"

  달칵, 키세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어서 와요, 키세군. 하며 저를 반겨주는 사랑스러운 애인, 쿠로코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아, 야간 비행은 너무 힘이 듬다. 키세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가방을 받아주는 쿠로코 어깨에 털썩 얼굴을 묻고 흰 목덜미에 뺨을 부비작거렸다. 방금 목욕을 끝냈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히고, 코가 맞닿은 피부에서는 보송보송한 살내가 훅 끼쳐왔다. 살풋 웃는 쿠로코가 느껴지고 제 허리를 끌어안아오는 팔도 느껴진다. 집에 왔구나. 키세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어깨에 얼굴을 더욱 깊이 묻고선 장시간의 비행에 긴장으로 지쳐있던 몸을 기댔다.

*

  얼마 간의 해후가 끝나고 뜨거운 물에 피로 좀 풀라는 쿠로코의 말에 키세는 얌전하게 물에 뜨끈하게 몸을 담그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탈탈 터는 키세에게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던 쿠로코가 보고 있던 책을 덮고는 키세에게로 다가왔다.

"빨리 머리를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겁니다, 키세군."

"에에, 나는 건강하니 괜찮슴다!"

"키세군."

"아, 정말~ 그럼 쿠로콧치가 말려주세요."

"그러죠. 말 안 듣는 어린이 키세군."

  으응...?! 쿠로코가 승낙할 줄 몰랐던 키세가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사이 쿠로코가 잽싸게 키세의 손에 들린 수건을 가져가며 킥킥 웃었다. 키세는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 쿠로코가 소파에 앉아 바닥을 발로 콩콩 두드렸다.

"안 올 겁니까."

"...?"

"모처럼의 기회라구요?"

"아, 아. 응...!"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키세는 후다닥 쿠로코의 다리 사이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얼굴과 귀가 새빨개진채로. 이 사람은 이렇게 가끔씩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할 때가 있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은 채로 눈만 굴려 시선을 올리니, 편안하게 눈을 내리깐 채 수건으로 제 머리칼을 감싸는 쿠로코가 보였다. 덩달아 아래로 내려간 속눈썹이 길게 말려올라간 것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는 것도 보인다.  예쁘다... 키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열려있는 베란다에서 미적지근한 여름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간간히 흔들고 지나간다. 거실에는 키세와 쿠로코의 호흡과, 쿠로코가 키세의 머리카락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문득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키세는 쿠로코를 눈에 담다 말고 팔을 뻗어 눈앞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키세군?"  

  자신과 같은 향기. 사실 아직도 쿠로코가 자신과 같은 집에서, 같은 샴푸를 쓰고. 사랑을 속삭이고, 몸을 맞댄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자기가 너무 좋아해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몇년 전 얼떨결에다가 엉망진창이었던 제 고백에, 키세군답네요. 하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던 쿠로코가 - 나중에 듣고 보니 너무 좋아서, 라고 대답해 혼자만 애태우게 했다고 잔뜩 칭얼거렸지만 - 아직도 생생해 그런 생각은 금방 지워졌다. 그래도 품 안의 체온과 감각에 뭉클해진 키세는 쿠로코의 배에 얼굴을 묻고 부비작거렸다. 

"그 때 쿠로콧치, 진짜 귀여웠는데."

"언제, 말입니까?"

"내가 고백했을 때요."

"... 그 때 이야기는 하지 말죠."

"에에, 쿠로콧치. 울었던 거 부끄러워하는 거죠, 지금?"

"네가 너무 늦게 고백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쿠로코가 위에서 볼멘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럼에도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은 여전히 애정이 가득하고, 다정하다. 응응, 맞아요. 내가 다 잘못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바디샴푸의 후르츠향과 같이 미미하게 쿠로코의 체향이 느껴진다. 아까 그렇게나 봤는데도 쿠로코가 보고 싶어졌다. 분명 놀림에 얼굴을 발갛게 익히고 있겠지. 억울하다는 듯 보고 있을 거야. 무척 사랑스러울 거야.

  키세는 참지 못하고 배에 닿아있던 얼굴을 들어올렸다. 

  아, 역시.

  뺨과 눈가를 붉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쿠로코가 보인다. 파아란 눈동자에는 자신이 담겨있다. 애인. 내 사랑. 내 사람. 마음 깊숙한곳에서부터 쿠로코를 향한 진득한 애정이 목을 치고 올라왔다.  키세는 팔을 뻗어 쿠로코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의아한 듯한 표정의 쿠로코가 닿을 듯 말 듯 바로 앞에 있었다.

"쿠로콧치."

"네, 키세군."

"쿠로콧치..."

"네."

"... 나랑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

"이렇게 어리광만 부리는데. 믿고 따라와줘서 고마워요."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 고민으로 서성이다 얼어붙은 입으로 어눌하게 했던 고백. 그리고 내밀었던 차가워진 손. 잡아줘서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맙다고.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해질 거라고 믿으며 키세는 이마를 콩 맞대고 눈을 휘어 달콤하게 웃었다. 앞으로 더 사랑할게요. 그러자 쿠로코가 양 손으로 키세의 뺨을 감싸며 입술을 마주대 왔다. 놀란 키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몇 초가 지났을까, 입술이 떨어졌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쿠,쿠,쿠,쿠로콧치?!"

  놀란 키세가 화악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쿠로코가 아까 키세가 했듯 이마를 콩, 맞대어왔다.

"이렇게 표현도 못하는 절 사랑해줘서 고맙습니다. 어리광부리는 사람이 키세군이라 행복합니다."

"쿠로콧치..."

"많이 좋아합니다. 보고 싶었어요."  

  이번 비행은 너무 길었습니다, 하며 해사하게 웃는 쿠로코를 키세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단 채로 바라보았다. 쿠로코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품에 있는데도 안고 싶었다. 키세는 한 손으로 쿠로코의 머리를 끌어당기고 정신없이 제 입술을 부딪쳤다. 기다렸다는 듯 열려오는 입술에 다른 손으로는 쿠로코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는 얼굴을 틀어 더 깊게 입술을 부볐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요. 

차마 입술 새로 새나가지 못한 말이 둘사이를 한참이나 맴돌다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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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나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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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흑] 꽃잠

썰 (?) 2015. 6. 1. 23:34
* 꽃잠은 첫날밤의 순 우리말입니다.

아이고, 신랑이 참으로 듬직하구만!
듣자하니 어린 나이에 무과에~

제가 탄 말이 걷는 길 주위로 웅성이는 아낙네들의 말이 아오미네의 한쪽 귀로 흘러들어갔다가 반대쪽 귀로 흘러나왔다. 호기심이 어려있거나, 저보다 더 들뜬 기색의 여러 시선들이 자신을 향해 꽂혀 있었으나 아오미네는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인 이 행위가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혼례라니. 이제 무술에 더욱 정진할 자신에게 참으로 뜬구름 잡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닥쳐오자 아오미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는 무신인 자신의 집과 반대로 문신 집안의 자제라고 했다. 집안의 권력과 직결된 정략 결혼이 으레 그렇듯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아오미네도 신부 쪽도 별로 개의치 않았기에 혼담은 착착 오갔다. 그리고 결국엔 대례를 치루는 오늘이 왔다.

제 신부가 될 사람은 몸이 약해 집 밖에는 잘 나오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방 안에서 주로 서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지냈는데 그러다보니 시•서•화에 능할 뿐만 아니라 여인네들이 배우는 자수나 요리에도 소질이 있다고. 자신보다는 2살이 많으나 아랫것들에게도 다정한 성품에 부모님께 효심도 지극하다고 했다.

자신과의 정략혼만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보다도 괜찮은 신랑감이 되었을터인데. 사내로 태어나 여인을 품지는 못할 망정 여인 행세를 해야하는 제 신부를 생각하자니 조금 웃겨 아오미네는 비식 웃음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사내를 안고 살아야하는 제 처지도 우스워 결국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뱉어냈다.

차피 이렇게 엮일 연이었다면 평생동안 계집 생각은 얼씬도 못할 만큼 사랑해주지.

씩 웃은 아오미네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마음 먹으며 왠지 모를 긴장에 괜히 짙은 남색의 관복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리곤 말에서 내려 신부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기백에 약한 신부가 질리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팔불출같은 고민도 잊지 않았다.

별 탈 없이 전안례를 마치고 대례청에 들어가 신부를 기다리는 그 순간이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손에 나는 땀을 스윽 관복에 닦아낸 아오미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무덤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닥쳐오니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제 신부의 모습이 얼른 보고 싶어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으려니 좀이 다 쑤셨다. 에잇, 못 참겠다 싶어 고개를 옴착거리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폴거리며 다가오는 제 옷과 같은 색의 남색 밑단과 풍성한 다홍치마, 그리고 그 아래로 살짝씩 보이는 작은 분홍빛 꽃신이었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리자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의 신부가 사뿐히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폭이 넓은 치마에 폭 싸여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선녀가 구름을 밟는 듯 했다. 큰 소리라도 낼라 치면 그대로 하늘을 밟고 올라가 날아가버릴 듯해 아오미네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꿈결 같던 짧은 시간이 지나, 어느 새 제 앞으로 다가선 신부는 존재감이 옅은 듯 오는 순간까지 눈 앞에서 아른아른 거렸으나 가까이서 보니 연한 물빛의 머리카락이 노오란 저고리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가지런히 내려떠진 속눈썹도, 올망한 코도, 꼭 다물린 앙증맞은 입술도 여간 어여쁜 게 아니었다. 눈 앞에 있는 이는 사내인데, 아오미네에게는 그저 어여쁜 제 신부,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맞절을 하고, 합환주를 마셨는지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건 흘긋 흘긋 볼 때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 신부였다. 예쁜 내 신부. 사내라 연지곤지를 찍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 애초에 사내가 치마를 입는 것도 이상하지만 - 하이얀 피부에 그래도 혼례라고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정신없이 폐백을 마치고 신방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떨리던지 아오미네는 침을 꼴깍 삼키고선 방으로 발을 들였다.

부부 화합을 나타내는 화접도가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고 한 쌍의 원앙 조각이 나란히 탁자 위에 놓여있는 방은 여기가 신방이요, 티가 확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비단 금침 옆에 얌전히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가장 아오미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몽롱한 불 그림자 밑의 신부가 여전히 참으로 어여뻐 아오미네는 슬쩍, 가까이 다가갔다.

작은 체구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신부는 아오미네의 자취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껴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 거동이 워낙 차분하고 조용해 아오미네도 덩달아 조용히 신부 곁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길 수십 초, 머뭇거리는 듯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이 벌어지고 나서야 궁금했던 신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술, 한 잔 받으세요."

"아, 응."

생각보다 강단 있는, 곧은 미성이었다. 마냥 사내라고 하기엔 가는 듯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적당히 무게가 잡힌 듣기 좋은 음색. 내 신부는 목소리도 곱구나. 헬렐레 풀린 얼굴로 아오미네가 신부를 지긋이 쳐다보자 그 시선에 신부는 긴장한 듯 몸을 굳혔다. 술병을 들어올리는 가는 손이 덜덜 떨렸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다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 순간, 아오미네는 그 애처로운 손목을 확 잡아채어 신부를 제 품으로 끌어 안았다. 눈 앞에서 예의 그 물빛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흩날리고, 오늘을 위해 발랐을 분내가 훅 끼치자 아오미네는 사내를 끌어안은 지금이 마치 꿈만 같았다.

한편, 신부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 눈만 연신 깜박였다. 닿은 뺨에는 넓고 단단한 가슴이, 허리를 끌어안은 강한 팔이 느껴졌다. 아마도, 자신은 이 커다란 사내의 품에 안겨있을 터였다. 이때까지 보이던 침착함은 어디 가고 신부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마냥 붉어졌다. 달아오른 볼이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엽고,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아기새 마냥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아오미네는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쉬, 그리 떨 것 없어."

토닥토닥.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이 등을 느릿하게 도닥였다. 두 팔로 가슴에 가득 담은 신부의 몸이 생각보다 가늘어 그럴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서질 것 같은 기분에 아오미네는 소중하게 신부를 추슬러 안고는 등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이름이?"

"... 테츠야.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 신부니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지?"

"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긴장하지 않아도 돼, 테츠."

다정하게 달래는 손길과 목소리에 테츠는 안정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옷자락을 쥐어왔다. 저를 찾는 듯한 손짓이 어여뻐 아오미네는 그만 말랑한 볼에 촉, 입을 맞추고 말았는데 테츠는 다시금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참으로 귀엽구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아오미네는 테츠를 안아든 채 소매로 초를 가리고 훅, 촛불을 껐다.

"이만 잘까, 테츠. 아, 부인이라 불러야하나?"

"장난은 그만둬주세요."

장난 가득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참으로 호남형이었으나 자신을 이불 위로 내려놓는 손길은 반대로 조심스러워 테츠는 상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질 것 같았다. 너무 화려해서 힘들었던 혼례복을 혹여 걸릴까 싶어 조심히 벗겨주는 손길이 다정한 이 사내가. 자신의 혼례복도 벗고 옆자리에 눕는 아오미네를 묵묵히 보던 테츠는 슬쩍 이불 속에 있는 아오미네의 단단한 손을 잡았다. 앞으로 평생동안 잡고 갈 낭군의 손이었다. 그런 테츠의 마음을 아는지 아오미네가 큰 손으로 작은 테츠의 손을 꼭 쥐었다.

"잘 자, 테츠."

"아오미네군도 안녕히 주무세요."

하루가 고단했던 듯 테츠는 금방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아오미네는 한동안 고운 얼굴을 바라보다 조심히 테츠를 끌어안았다. 폭 안겨오는 체구가 자로 잰 듯 꼭 맞춘 인연인 것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났다. 불쌍하던 한 사내가 누가 뭐래도 곱고 고운 제 사람이 됐다. 테츠를 꼬옥 안았다가 놓아준 아오미네는 앞으로 뭐 좀 많이 사다가 먹여서 살 좀 찌워야겠다, 생각하고는 테츠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둘을 재우듯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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